불교계, “‘불교 도움으로 천주교 뿌리내렸다’는 인식 가져야”

지역 천주교계가 여주 산북면의 주어사지 원형복원을 위해 설치한 연등에 대한 철거를 요구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이에 불교계는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불교가 도왔다는 사실을 천주교계도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 스님이 절터를 찾던 중 잉어를 따라가던 꿈을 꾸고 얻은 터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주어사지(走魚寺址)'. 14일 오전 이곳에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여주 지역의 한 성당에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60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정하고 순교자들을 기리도록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 관계자들도 주어사지를 방문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연등이 무사히 달려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난 7월 ‘주어사 원형복원 발원을 위한 1000일 기도 입재식’을 가진 이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10일경 제2교구신도회는 지역의 한 관계자로부터 연등과 불교 관련 설치물들을 거둬갔으면 한다는 지역 천주교계 측의 요구 사항을 전해 듣게 된다.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있으니 불교 관련 상징물을 떼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주어사지의 역사계승과 원형복원을 위한 기도를 시작한 상황에서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만 뗐으면 한다는 요청도 있었지만 들어줄 수 없었다.

2교구신도회 관계자들이 천주교 행사 날 이곳을 찾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초 정기 순례기도가 다음 주로 예정돼 있지만, 연등 훼손에 대한 우려와 상황 파악을 위해 급히 현장을 찾은 것이다. 다행히 입재식 때 설치한 연등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하지만 신도회 관계자들은 이웃종교가 주관한 기도 현장을 지켜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주어사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는 것만 강조할 뿐 불교의 보호로 천주교가 싹틀 수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천주교 수원교구 산북성당 최덕기 주교와의 인터뷰에서도 연등을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최 주교는 “보도를 통해 (주어사지 원형복원 기도) 소식을 접했다. 앞으로 이곳이 종교화합의 성지로 가꿔갔으면 한다”면서도 “이웃종교 입장에서는 특정종교를 상징하는 시설물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거둬 가는 게 맞다”고 밝혔다.

현재 절두산 성당에 있는 해운당대사 의징스님비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고달사지 처럼 제대로 된 복원이 이뤄진 다음 비도 이곳에 오면 좋겠다”며 “지금은 돌무더기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주교의 이같은 발언에 민학기 제2교구신도회장은 “주어사 스님들은 서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장소까지 제공했다. 그런데 사찰이 있었던 자리에 연등을 다는 게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며  “상징물을 제거하라는 말은 복원을 중단하라는 뜻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서로 간의 의견차도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안을 공론화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법수 전 대한불교청년회장은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한국 불교의 큰 희생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복원됐으면 한다”며 “성역화 사업으로 불교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천진암에 대한 재조명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주어사지는 조선시대 탄압받던 천주교인들을 보호하려다 폐사됐다.

현재 이곳은 한국 가톨릭의 발상지로만 잘못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정부의 박해를 피해 천주 학자들을 숨겨준 그 현장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천주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장소까지 제공해 주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도들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스님들도 함께 처형을 당했다. 이후 사찰도 폐사되면서 무려 20년 넘게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한 역사적 사실 또한 묻혀버리게 됐다.

신도회의 역사계승과 원형복원을 위한 기도순례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올바로 알리고 바로잡기 위해 시작됐다. 이를 위해 지난 7월6일 제2교구본사 용주사 스님들과 교구신도회의 입재 발원기도를 봉행하고, 월2회 정기 순례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조만간 경기도와 여주시에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한 역사적 사실이 사장되거나 왜곡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건의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