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가톨릭대에서 1997년 과거사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1866년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수많은 양민을 살해한 병인양요 당시 천주교의 역할을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세미나에 참석한 교수들은 사과성명을 통해 병인박해를 이유로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병인양요에 대해 참회의 뜻을 밝혔다. 이후로도 병인양요에 대한 참회의 성명은 가톨릭계에서 몇 차례 이어졌다.

그런데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방한 순례지를 보면 과연 가톨릭의 참회가 진정성을 지닌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충남 해미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가톨릭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이 발생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제사를 거부하고 서양과 교류를 주장하는 가톨릭 교세의 성장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톨릭 국가인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조선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한 것이다. 병인박해였다. 이때 선교사 8명과 천주교도 8000명이 사형을 당했다. 서소문에서, 노량진에서, 그리고 해미읍성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번에 교황이 방문해 시복을 행한 장소는 이때 사형이 집행된 공간이다. 이곳에서 교황이 시복행사를 했고, 한국 천주교는 그곳을 성지화 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사형을 집행했던 흥선대원군과 척화를 통해 조선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우리 선조들은 성인을 집단 살해한 주범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선교사들은 중국에 머물던 프랑스 함대에 요청해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군은 9000명의 조선 백성을 죽이겠다며 강화도를 침범했다. 결국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약탈하고, 양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음에야 프랑스 함대는 물러났다.

일부 천주교인들이 종교적 박해를 되갚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사건이 병인양요인 것이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양민들이 얼마나 희생됐으며, 또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얼마나 약탈당했던가. 그런데 교황 방문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가 보인 모습은 어떤가.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광화문 앞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우고 시복행사를 진행했다. 대통령은 마치 교황보다 아랫사람인 듯한 인식마저 주었다. 무엇보다 천주교인들을 보호하다가 스님들이 죽음을 맞고 폐사된 천진암이나 주어사지를 방문하지도 않았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번에 보인 모습과 교황의 소탈한 모습은 동떨어져 보인다. 천주교가 늘 말하던 화해와 평화, 생명,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한국 가톨릭이 과거에 외세를 끌어들여 우리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것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는가. 조선을 위기에 빠트린 병인양요를 일으킨 반성은 없고, 병인박해 희생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잃어버린 것이다. 당시 빼앗긴 <조선왕조실록>을 되찾기 위해 가톨릭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돌아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황의 방문지를 순교지가 아니라 화해의 장소로 정했어야 옳다.

국가에서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교황의 시복행사를 지원하는 것도 다종교국가에서 좀체 볼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교황이 시복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장을 성지로 만든다면, 흥선대원군과 구한말의 선조들은 역사적 죄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진정으로 천주교가 한국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한다면, 민족의 역사에 대한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길 기대한다.

[불교신문3036호/2014년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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