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마음수련 참선보급에도 반드시 필요

참선수행의 4단계 분류 방법은
둘 아님의 힘을 얻는 不二得力

부처님을 관하는 觀佛三昧 수행
五蘊을 法身으로 관하는 단계와
선과 관을 동시에 닦는 禪觀雙修

마음 닦는 일체수련은 다 참선입니다. 그런데 이 참선의 방법이 다기망양(多岐亡羊)한 관계로 초심자들에게는 상당한 혼란이 초래됩니다. 때문에 참선이 오히려 마음을 방황하게 하는 수가 많습니다. 아울러 참선의 비효율성 문제가 흔하게 대두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참선 수행의 객관적 체계는 너무나 중요하고 절박하며, 참선 수행의 체계성 확립은 한 개인의 바른 마음수련은 물론 참선의 대중적 보급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에 본인은 참선 수행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누어 그 체계를 세웠습니다. 제 1단계는 불이득력(不二得力)의 수행입니다. 둘 아님의 힘을 얻는 단계로써 들뜬 흥분상태를 임시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수행입니다. 예를 들면 극단적 분노를 가라앉힌다거나, 허황한 탐심의 발동을 억제한다거나, 깊은 터널 속의 망상에서 빠져나오는데 아주 좋은 수행입니다.
 

필자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회주 우학스님이 쓴 붓글씨 ‘선관쌍수(禪觀雙修)’.
필자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회주 우학스님이 쓴 붓글씨 ‘선관쌍수(禪觀雙修)’.

이 수행의 가장 좋은 소재는 신묘장구대다라니입니다. 횟수를 정해놓고 독송하든가 시간을 정해놓고 독송하면 됩니다. 이 불이득력의 요체는 몰입입니다. 완전한 몰입, 완전한 정(定)에 들도록 수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라니도 없고 본인도 없는, 즉 다라니와 독송자가 완전히 하나가 된 자타합일(自他合一)의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과도한 진심(瞋心), 탐심(貪心), 치심(癡心)이 수련 시간만이라도 억제 또는 쉬어져야 합니다. 불이득력(不二得力)의 수행은 남방에서 일컫는 사마타인데 참선 수행의 기본입니다.

제2단계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의 수행입니다. 부처님을 관(觀)함으로써 얻는 삼매의 단계입니다. 참선 수행의 두 번째 단계로써 산란한 마음을 잡도리해서 극히 현재적인 자기 위치로 돌아가게 하는 아주 실용적이면서도 현실적 수행입니다. 관, 즉 비파사나 수행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왔던 참선 방법으로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관불삼매의 수행입니다. 이 관의 수련은 욕망에 반응하지도 않고 욕망에 구속되지도 않는 힘을 기르게 합니다. 말 그대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한 욕망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무의식적 본능을 억지로 통제하려는 의지조차 갈 곳 없게 하는 수련이 이 관법(觀法)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어서 정학(定學)이 불이득력(不二得力)의 수행이라면, 혜학(慧學)은 관불삼매(觀佛三昧)의 수행입니다. 일체 관(觀) 수행의 결론이 관불삼매입니다. 즉, 관불삼매란 부처님을 관해서 삼매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당의 모셔진 부처님들이 다 관불삼매의 수행 장치가 됩니다. 단 관불삼매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가능하면 자비로운 상호가 좋습니다. 선문(禪門)에서 정관(靜觀)이라는 말을 하는데 부처님을 친견하는 지침으로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제3단계는 오온법신(五蘊法身)의 수행입니다. 오온(五蘊)을 법신(法身)으로 관하는 단계입니다. 참선 수행의 세 번째 단계로서 아주 긍정적이면서도 구체적입니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무시하고서는 그 어떤 성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성취가 지금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수행이 오온법신의 수행입니다. 전 단계의 관불삼매의 수행은 반드시 대상으로써의 부처님이 필요하였지만, 여기 오온법신의 수행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것이므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실지로는 만만치 않습니다.
 

회주 우학스님이 쓴 붓글씨 ‘선관쌍수(禪觀雙修)’.
회주 우학스님이 쓴 붓글씨 ‘선관쌍수(禪觀雙修)’.

제1, 2단계의 수행이 익지 않으면 여기 제3단계의 수행이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선문에서 흔히 쓰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말은 오온법신의 수련에서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성성하면서도 적적한 상태가 염념상속(念念相續) 되어져야 하고, 현재 자기 자신의 사대(四大) 육신에서 관세음보살의 법신을 발견하여 그것을 똑바로 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기 자신이 관세음보살이요, 부처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부정적 에너지는 소멸되고, 삶은 지금 상태 그대로 살맛이 나게 되지요. 이 수련이 익어 가면, 부처가 잠자리에 들고 부처가 일어나며 부처가 활동함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제4단계는 선관쌍수(禪觀雙修)의 수행입니다. 선(禪)과 관(觀)을 동시에 닦아가는 마음공부로써 선관쌍수의 단계는 총체적이면서도 결론적입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선풍이 화두선인데, 이 화두선이 세계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수준이 이 화두선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근기(根機)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간화선의 알파요 오메가는 당연히 시심마(是甚麽) 화두로서 시심마 화두의 요체는 ‘나는 무엇인가?’입니다. 모든 화두가 궁극적으로 통하는 길은 시심마에 있으며,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모든 화두가 다 풀리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알아버렸는데 다른 또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고,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시심마’, ‘이 뭣고’, ‘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심마 화두는 좀 막연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체성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관쌍수는 이 점을 고려한 수행입니다.

제3단계의 오온법신 수행, 즉 나 자신을 법신으로 관하면서 ‘이 관하는 나는 무엇인가?’ 하고 궁구해가는 수행이 바로 선관쌍수의 수행입니다. 이 수행은 대상으로써의 부처를 보고 있으면서, 아울러 부처를 보는 주체,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함께 찾는 고도의 정신 수련입니다. 이것은 염불선(念佛禪)과도 판이하게 다르고, 이미 언급한 막연한 시심마 화두와도 차원이 다릅니다. 선관쌍수의 수행은 그만큼 진입하기 어렵습니다만, 그 결론은 위대할 것입니다.

맺는말입니다. 공부의 정도, 즉 정신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는 곧 세속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주로 점검이라고 합니다. 이 점검은 수준 있는 선지식의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나 만일 마땅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무문관(無門關) 48칙’을 가지고 스스로 체크해 보면 됩니다.

만일, 무문관 48칙을 모두 투득(透得)하였을 경우에는 참선 공부가 끝이겠지만, 만일 하나라도 걸림이 있을 경우에는 선관쌍수의 수행을 끊임없이 반복해가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 선관쌍수의 수행이 여의치 않을 때는 앞의 3단계의 수행을 계속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참선 공부도 일반 사회 공부와 마찬가지로 체계를 밟아야 빨리 갈 수 있고, 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쓴 ‘완벽한 참선법’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는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⑲ 蜜甘育苦(밀감육고)

꿀은 달지만, 돌봄은 쓰다

누가 보시한 양봉을 관리하면서 만든 한자성어입니다. 벌통만 갖다 놓으면 저절로 꿀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벌을 키워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무문관에서 정진 중인 스님들께 공양 올린다는 신심(信心)으로 열심히 돌보기는 하나, 꿀을 채취하기까지 그 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름 더운 날 말벌들이 와서 집적대면 그놈들을 쫓아내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벌통 주위를 서성대면 그놈들과도 씨름하여야 하고, 입 큰 개구리가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낚시질하듯 혀를 쭉쭉 내밀면 그놈들을 훈계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때로는 개미 떼들이 줄을 서서 벌집을 오르면 속이 다 탑니다.

그리고 개체 수가 많아져 벌들이 주렁주렁 길게 머리카락 땋듯 드리우면, 땀 줄줄 흐르는 양봉 옷을 입고 나무상자를 두세 켠 더 받쳐줘야 합니다. 가끔 꿀을 따보면, 그 맛은 정말이지 그저 그만입니다만 과정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기야 그 정도의 노고는 감수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우리 기성 불자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대단히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가장 큰 원인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서입니다. 불교재단의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수가 너무 적습니다. 10분의 1 수준도 따라가기 힘든 상황입니다. 

저희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에서는 진작부터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재원과 정열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단위사찰로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사고도 납니다. 좌절할 때도 있지만, 교육된 우리 신도들의 염원이 오직 한 방향이기 때문에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 염원은 “우리 아이들을 잘 돌보아서 불국토 건설의 초석을 마련하자”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을 모집하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그 때문에 장학금도 더 많이 지출해야 합니다. 시설도 끊임없이 보완해야 합니다. 하지만 10년, 20년 후의 불교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돌봄’은 감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蜜甘育苦(밀감육고) 꿀은 달지만, 돌봄은 씁니다.

[불교신문3640호/2020년1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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