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의 門 닫고 ‘문 없는 문’을 타파하라”

토굴과 대중선방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정진 수행처
경주 감포 무일선원 무문관은
청규와 사홍서원 마련돼 있어

영화 ‘무문관’을 본 많은 불자(佛子)들께서 무문관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문관 수행의 여러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무문관에서 나온 편지 한 통을 읽어드릴 테니 집중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원력으로 자비행을 실천하시는 무일선원 소임자들께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 배 올립니다. 여기서 정진한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무문관이야말로 발심해서 오로지 정진만 할 수 있게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무문관에서 3년 정진하는 것이 여기저기 선원을 떠돌며 30년을 정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승하다는 것을 정말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납 70을 맞고 보니, 생사대사만큼 큰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느낍니다. 여기 결제하러 오기 전부터 이미 결심한 일이지만, 무문관에서 정진하는 동안 더욱 더 결심이 확고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생을 기필코 무문관에서 결제 해제 없이 종신토록 수행하여, 반드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최후의 일각까지 정진심을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합니다.
 

필자 우학스님이 경주 감포에 창건한 무일선원 무문관 모습.
필자 우학스님이 경주 감포에 창건한 무일선원 무문관 모습.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게 되면 또 다음 생의 대원력을 성취하기 위하여 홀연히 떠나리라는 결심을 했는데, 이제 이 뜻을 밝혀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일선원 무문관에서 결제 해제 없이 정진할 수 있도록, 무문관 종신 수행을 수락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0을 맞고 보니 저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무문관 종신 수행뿐입니다. 

요즘 스님들은 늙고 병들면 거의 요양원이나 병원을 택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절대로 요양원이나 병원 신세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무문관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최후의 일각까지 정진하다가 다음 생의 대원력을 성취하기 위하여 곧바로 원력수생(願力受生)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수일 내로 수락 여부를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일선원 무문관을 후원해 주시는 모든 신도님들께도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무문관 정진 ○○ 배상.”

제가 이 무문관을 세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스스로의 무문관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4년에 강원도 인제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에서 동안거를 났었는데, 제가 공부를 해보니 ‘아, 이 무문관이야말로 토굴과 대중선방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정진 수행처이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해제 후, 大관음사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불사를 시작해서 2005년 동안거부터 ‘무일선원 무문관’을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문관은 나름 청규(淸規)가 있습니다. 청규는 총 여덟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묵언한다. 둘째, 독서나 취미생활은 가급적 삼간다. 조사어록은 제외한다. 셋째, 휴대폰 사용은 일절 할 수 없다. 넷째, 옆방 정진에 피해를 주는 소리 지음을 조심한다. 다섯째, 포행 마당에서 울타리 틈으로 옆방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여섯째, 술 담배 마약을 절대 금한다. 일곱째, 기타 제반 사항은 옛 청규와 율장에 준한다. 여덟째, 위 사항을 위반 시, 퇴방 조치 당할 수 있다. 

무문관은 개별 정진을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역시 대중선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같이 지켜야 할 규칙을 이렇게 제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 외에도 무일선원 무문관은 오신채마저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양 횟수는 하루 한 끼입니다. 즉, 일종식(一種食)입니다. 오전 11시에 공양이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 9시에 공양할 그릇을 수거해 갑니다. 그리고 특수선방인 무문관에서 수행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제 나름대로 세운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근(六根)의 문(門)을 잘 닫아서 스스로를 잘 지켜라’입니다. 제가 만든 한자성어에 ‘守門見性(수문견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문을 잘 지켜야 자기 성품을 본다는 뜻입니다. 이때의 문은 육근(六根)의 문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즉, 문을 잘 지키고, 문을 잘 닫아놓으려고 무문관에 들어간다고 보면 딱 맞습니다. 

무문(無門)이라 하면, ‘문이 없다’는 뜻인데, 왜 ‘문이 없다’라고 표현할까요? 문을 완전히 폐쇄시켰기 때문에 문이 없다, 즉 무문(無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문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육근의 문을 철저히 닫아두어야 합니다. 만일, 자기 집에서라도 무문관 수행을 체험하고 싶다면, 그 기간만큼은 일절 외부 출입하지 않고, TV 보지 않고 묵언하면서, 철저한 일종식에, 전화기 사용하지 않으면 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먹을 때 잘 먹고, 잘 때 잘 자라’입니다. 먹고 자는 것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더러 사고가 납니다. 즉, 실성(失性)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몸이 부실해지고, 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무문관에 들어오려면 본래로 심신(心身)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 대중 선방처럼 3시에 일어나고 10시에 취침하면 됩니다. 선방 생활에 있어서 무언의 약속이 ‘3시 기상, 10시 취침’입니다.

세 번째는 ‘허리 안 아파서, 절 잘하고 참선 잘하기’입니다. 허리가 아프면 절도 잘 안되지만, 앉아서 하는 좌선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늘 스트레칭 운동을 통해서 허리 관리를 해야 합니다. 윗몸일으키기를 하든지, ‘허리 튼튼 운동’을 해야 합니다. 절은 하루에 108배, 500배, 1000배씩 매일 하면 허리가 아주 튼튼해집니다.

네 번째는 ‘눈 건강해서 사경 잘하고, 조사어록 잘 보기’입니다. 무문관 안에서는 조사어록을 틈틈이 봐야 합니다. 조사어록이 공부의 방향을 잡아주고, 공부를 점검해 줍니다. 따라서 조사어록을 잘 보려면 눈이 밝아야 합니다. 또한, 사경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눈이 밝아야 합니다. 화두선을 하는 틈틈이 하루 한두 시간씩 사경을 하는 스님들도 많은데, 이는 시간을 아주 잘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곳 경주 감포 소재 ‘무일선원 무문관’은 수행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는 무문관 수행처가 한적한 곳으로 떨어져 있어서 외부인들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둘째는 해풍(海風)과 산풍(山風)이 만나는 지점이 돼서 기운이 아주 맑고 좋습니다. 산 기운과 바다 기운을 같이 느낄 수가 있는 도량입니다. 셋째는 대나무가 많은 죽림(竹林)이라서 피톤치드가 엄청 나옵니다. 따라서 건강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어렵사리 전세  3000만원으로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를 창건하고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이 무일선원 무문관을 연 것이 가장 보람된 불사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 방부를 들인 스님들이 공부를 다부지게 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래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현재 한국불교는 큰 인물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3년 정진, 특수선방 무문관이 그 역할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번 기회에 무문관을 후원해 주시고 늘 공양 올려 주시는 ‘선방후원회’ 불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세음보살! 

*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는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⑯ 勿親無腦(물친무뇌)

생각이 없는 사람과 친하지 마라

한 상좌가 말했습니다.
“은사 스님, 그 사람과 얘기하고 나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응수했습니다.
“그 정도인가?”

“예, 허우대는 멀쩡한데요, 벽창호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10년쯤 됩니다.”
“너도 생각이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지금 바쁘다.”

물친무뇌(勿親無腦)라!

뇌가 없는 사람은 상대 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생각이 모자라고 멍청한데, 상대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입 섞어서 말도 하지 말고, 상종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스님, 중생을 버리라는 말입니까?”

첫째는 해보고 안 되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힘이 모자라서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성싶으니 빠져나오란 말입니다. 예부터 써오던 좋은 말이 있습니다. ‘묵빈대처(默擯對處)’입니다.

[불교신문3634호/2020년1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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