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줏단지 없애고 ‘가정 법당’ 꾸미는 게 바람직

“신줏단지 없앤다고 불안해 말고
다니는 절의 스님과 의논해서
모시고 와서 신중단에 올려 두길”

민간신앙 벗어나 정법신행 권장

먼저, 들어온 두 통의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원도 홍성에 사는 어설픈 불자입니다. 늘 유튜브를 통해 스님 법문을 듣다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편지를 써 봅니다. 신줏단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일입니다. 남편이 하던 사업이 기울어지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부족했던 저는 점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점집에서는 다짜고짜 ‘조상신이 배가 고파서 너희 집에 와서 치근덕거리고 있으니 빨리 그 신들을 거두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다급했던지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3개의 신줏단지를 조상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핀잔을 주었으나 극구 물리치지는 않아서 농짝 위에다 모셨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남편의 사업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 점집을 찾아갔더니 조상이 오래 배가 고파서 아직도 허기져 있다면서 푸닥거리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돈을 빌리다시피 하여 크게 또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1년이 지났으나 별 나아지는 게 없었습니다. 점쟁이는 1년 전에 했던 말을 녹음기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크게 믿음이 깨진 상태였지만,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아까워 ‘이번에만큼은’ 하는 기대감으로 또 푸닥거리를 하였습니다. 그러기를 3년 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재물은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이게 아니다 싶어서 신줏단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절에 많이 다녔습니다. 신줏단지는 방치된 채 아직도 농 위에 있는데 벌써 4년이 더 지나갔네요. 지금 생각하니 신줏단지를 모신 것이 후회스럽기는 하지만, 또 막상 다 치우려니 마음이 아주 찝찝합니다. 혹시 화나 당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됩니다.

신줏단지를 모신 후 3년은 연속적으로 매년 푸닥거리를 하였지만, 그 뒤로 4년간은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 이럴 경우에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신줏단지를 치우고는 싶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후환이 두렵습니다. 간곡하게 스님의 조언을 구합니다! 스님, 늘 건강하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또 다른 편지입니다.

“스님, 유튜브 생활법문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는 초보 불자입니다. 저의 집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줏단지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가 시집을 오니 저의 시어머니 되는 분이 신줏단지 모시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아직 60대인지라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괜찮겠지만, 뒤가 큰일입니다. 즉, 저의 며느리가 다른 종교를 믿고 있어서 신줏단지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특히나 아들 내외는 도회지에 나가 살고 있고, 여기 시골에는 우리 집 영감과 둘이만 있습니다.

우리 두 내외가 시간이 지나서 죽게 되면 이 집 자체가 비게 될 것이 뻔한데,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이 신줏단지입니다. 저는 자식들이 무탈하게 자라 결혼해서 잘 사는 것이 신줏단지의 영험이라 생각하는데, 저희 당대까지만 모신다는 게 뭔가 죄송하기도 하고 불안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몇 십 년 후의 일이 되겠지만, 저희가 죽고 난 뒤에 신줏단지로 인해서 아이들에게 부담을 준다면 그것 또한 괴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스님, 이 신줏단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정의 신줏단지는 없애고 가정법단으로 꾸는 게 바람직하다. 사진은 필자 우학스님의 붓글씨 ‘법력(法力)’.
가정의 신줏단지는 없애고 가정법단으로 꾸는 게 바람직하다. 사진은 필자 우학스님의 붓글씨 ‘법력(法力)’.

제가 20대 젊은 시절, 학부에서 공부에 열중할 때입니다. 한국불교사의 대단한 권위자이신 김영태 교수님께서 강의 중에, 신줏단지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줏단지는 어떤 지방에 가면 세존단지라고 합니다. 세존이란 석가세존, 즉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세존단지는 부처님께 올리는 쌀 공양물의 그릇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고려시대까지는 소조상의 부처님도 같이 모시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자가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리는 것은 마땅한데, 가장 먼저 가을 추수한 쌀을 잘 찧어서 그 단지에 넣었던 것입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각 개인 집마다 불상(佛像)을 모시는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렸을 테고, 그 흔적이 세존단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조선이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의 정책을 펴다 보니, 가정집마다 호가불(護家佛)로써 모시던 부처님은 차츰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쌀을 담아서 공양 올렸던 그 흔적만큼은 남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존단지인데,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발음이 깎여 신줏단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존단지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습니다.”

온몸을 쓰면서 열강하시던 한국불교사의 국보급 교수님의 말씀이었던지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는, 세존단지가 되었든 신줏단지가 되었든 불교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편지의 경우를 잠시 짚어보겠습니다. 점집에서 신줏단지를 설치해 주었는데, 매년 경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지금은 방치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모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이왕 모셔 두었으니, 지금 치웠을 경우에 받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감안하여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농 위에 그대로 두십시오. 10년을 채우기를 권해드립니다.

대신 보살님은 앞으로 남은 3년의 기간을 ‘내공(內功) 쌓는 기도 정진’으로 삼으십시오. 3년 바짝 기도 정진하시면 신줏단지에 전혀 걸림이 없는 마음 상태가 될 것입니다. 지금같이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 신줏단지를 치웠을 경우에는 화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화가 실지로 있기보다는,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이라도 ‘신줏단지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으로 그 ‘피해의식’이 크게 여울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에 보살님이 스스로 철거하면 됩니다. 철거 직전, 일주일 정도는 <금강경>을 좀 많이 읽으시고 사경하시길 바랍니다. 태울 것이 있으면 박스에 잘 담아서 인연 있는 절에 나가서 잘 말씀드리고, 소대에서 태우면 됩니다. 이때는 금강경 사경했던 것도 같이 소각하면 좋습니다. 소각하실 때는 소전진언 ‘옴 비로기제 사바하’를 외우시면서 법성게를 독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에 10년이 되었는데도 본인이 스스로 농 위의 신줏단지 및 설치물을 철거할 자신이 없으면, 다니는 절의 스님을 모시고 가서 그 스님 더러 치우게 하면 됩니다. 신줏단지 안에는 분명히 쌀 등 곡식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분리해서 새 먹이로 주고 단지는 사용하면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찝찝하다면, 신줏단지를 다른 보자기에 새로 잘 묶어서 절로 가지고 가십시오. 절에 가서는 사찰의 소임자 스님이나 종무 직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잘하고 신중단에 올려두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본인이 직접 치우는 것보다는 마음의 부담도 적을 것이고, 모든 것이 아주 깨끗합니다. 단, 꼭 해야 할 의식이 있는데 바로 천도재입니다. 점치는 사람이 애초에 모실 때 ‘무슨 조상’이라고 말했다면 그 조상님을 잘 천도해 드려야 합니다. 특별천도재를 꼭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평생위패를 올려드리십시오. 

그럼 정말 ‘그 조상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인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리해 가는 입장이니까 망상을 자꾸 보태면 안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신다면, 한 점 마음의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가 된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두 번째 편지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편지는 꼭 저의 속가 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집에는 신줏단지가 큰 방 아주 좋은 위치, 높은 곳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주로 관리는 조모님이 하셨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정성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을 추수가 막 시작되면 첫 수확한 벼를 베서 그 낱알을 모아서 큰 솥에 넣어 쪄냅니다. 그것을 다시 잘 말려 재래식 디딜방아에 넣어 찧습니다. 그러고는 키질을 해서 알곡을 모읍니다.

그게 찐쌀입니다. 그 찐쌀을 신줏단지에 담습니다. 전 해의 것과 교체하는 일입니다. 이때 조모님은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정성껏 기도를 하셨습니다. 불교식 기도가 아니고, 민간신앙적 기도였으므로 주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가족 구성원의 소원을 비는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 정도라면 김영태 교수님의 말씀대로 세존단지의 원형을 잘 살려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무슨 얘기인가?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정토 가정 법당’을 가정마다 꾸며 보자는 것입니다. 정토 가정 법당의 가장 중심에는 부처님을 모시면 됩니다. 소조상도 좋고 사진도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불기(佛器)가 있어서 매일 부처님 앞에 쌀공양을 올리면 됩니다. 그 올린 공양으로 가족의 밥을 지으셔도 되고, 잘 모아서 절에 가지고 오셔도 됩니다. 물론 금전공양으로 대체해도 관계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불자니까 모든 수행과 기도 방법을 정법에 의거해서 부처님 중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두 번째 편지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보살님이 모시고 있는 신줏단지는 보살님 대에서 끝내는 것이 맞습니다. 다니는 절의 스님과 의논해서 스님이 신줏단지를 모시고 가든지, 아니면 보살님이 ‘이제 절로 가십시다’ 하고 고(告) 한 뒤 절로 모시고 오십시오. 그리고 신중단에 올려 두십시오.

그러면 스님들이 다 처리해 줄 것입니다. 불안해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20년 전부터 신줏단지를 없애고 가정 법당을 꾸미는 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한 번도 부작용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죽기 전에 얼른 잘 처리하는 것이 후손들에게 짐이 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 

*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는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⑰ 霧撤巖顯(무철암현)

안개 걷히니 바위가 드러나도다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가 20년에 걸쳐서 가꾸고 있는 명상센터가 있습니다. 감포도량입니다. 서기 2001년에 대웅전을 짓고, 2005년에 무일선원을 열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 도량을 확장 중인데, 요즘은 ‘유튜브 보궁 법당’, 즉 성불전(成佛殿) 불사(佛事)를 한창 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바닷가에 해변힐링마을인 ‘일출大관음사’를 열고 코로나 펜데믹 전까지 체계적으로 명상 힐링 수련을 해왔습니다. 감포도량 일대는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천혜의 수행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신도님들의 발원에 의해서 세계적 명상센터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바, 그 정식 명칭이 ‘B.U.D 山海 세계명상센터’입니다.

한번은 이른 아침, 신도님들과 산중 무일선원에서 해변힐링마을로 나갔더니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노천의 영산전에서 방생지인 용바위를 내려다보는데, 150미터 거리에 있는 그곳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안타까워하는 중에 산바람이 바다 쪽으로 불더니, 안개가 일시에 싹 걷히면서 그 멋있는 용바위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신도님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무철암현(霧撤巖顯)! 안개가 걷히니 바위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심성(心性)도 이와 같습니다. 내안에는 정말 잘나고 훤칠한 참나, 즉 자성불(自性佛)이 있습니다.  

[불교신문3636호/2020년12월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