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고 주체적 존재 ‘인간’이 곧 불교다
평등하고 주체적 존재 ‘인간’이 곧 불교다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1.06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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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창간 60주년 불교신문 제언

한국불교 역사는 곧 ‘禪’ 역사
선원과 수좌로 넘치는 오늘날
그런데 왜 또 결사 필요한가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인간에 관한 고민이 빠져 있어

불교신문이 창간 60주년을 맞았다. 1954년 정화 후 이듬해 비구 종단이 출범하고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는, 한국현대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불교신문은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사명이 청정비구승단 외호(外護)와 정법(正法) 전법(傳法)이었다. 

조선 500여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불교는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렸다.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들어오고, 통일신라는 화엄으로 통일했다. 화엄을 기반으로 선(禪)이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뤄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면면이 이어졌다. 임진 병자 양난 이후 왕실 권위가 무너지고 유학이 득세하면서 불교는 말살 위기를 맞았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고립은 깊어졌다. 살기 위해 무속과도 손을 잡아야 했다. 
 

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동하고 사고하도록 힘을 길러준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곧 인간에 관한 고민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된다.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사진은 봉은선원에서 참선중인 불자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동하고 사고하도록 힘을 길러준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곧 인간에 관한 고민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된다.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사진은 봉은선원에서 참선중인 불자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정법 수호 종단 외호 소임 

등불이 꺼지기 직전 기적처럼 경허라는 걸출한 고승이 등장했다. 방한암 백용성 등 선지식이 수없이 나왔다. 1000년 넘게 내려오며 다져진 한국 선의 토대가 그만큼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다. 선의 토양이 풍성한 만큼 오염도 심했다. 선지식의 출현으로 선이 기지개를 켜는 한편, 세속화도 급속도로 진행됐다.

일제 총독부의 불교 어용화, 계급화, 대처화는 한국불교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스님 간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세속 욕망이 승단에 침투했다. 승가공동체니 조사불교니 하는 전통은 희석됐다. 정법(正法)보다 세속의 출세, 물질이 더 중요시 되는 풍토를 만들었다. 

1700여년 한국불교사에서 승려가 타락하고 불교가 쇠(衰) 할 때마다 등장한 묘약(妙藥)은 선이었다. 화엄이 권력과 결탁하여 보수화 됐을 때 도의국사가 들여온 선(禪)이 새로운 나라의 정신 지표로 등장했다. 권력에 취해 비틀거릴 때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며 내건 정혜결사 역시 선(禪)이다. 

수선사 계통이 국사를 차지하며 무신정권, 원 간섭에 조응할 때 개혁책으로 등장한 것은 태고보우, 나옹혜근의 간화선이었다. 구한말 경허 역시 그러하며, 1948년 봉암사 결사가 유구한 선의 역사를 계승했다. 선의 역사를 잇고 그 정신을 품은 한국불교사 최대의 변혁이 바로 정화며 그 결실이 대한불교조계종이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종단을 창종한 선은 부처님 정법, 청정 불교, 한국정통 불교를 내세우며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불교신문의 창간은 이를 사회에 널리 알리려는 선사들의 원력 결집체이며 이후 60년간 그 소임을 충실히 이행했다.

왜 선(禪)은 승려가 타락하고 불교가 부패하고 사찰이 살 찔 때마다 구원투수로, 특효약으로 쓰였을까? 그에 앞서 선(禪)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의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광덕스님이 일찍이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스님은 선을 일러 “근원에 사무쳐서 절대적 주체를 자각한 행(行), 인간 진면목(眞面目)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성 확립”이라고 정의했다. (1980, 선관책진) 선은 인간의 참모습을 알려줌으로써 생명을 부여한다. 광덕스님은 그래서 “선은 무엇이 인간이냐를 문제 삼으며 참된 자신의 면목에 대한 깊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불교는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만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았다”

불성에 대해 <육조단경>은 이렇게 정의한다. “만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았다”. 자성이 곧 불성이다.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을 처음 친견하며 나눈 문답에서 불성이 무엇이며 왜 선이 인간을 품는지 보여준다.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묻는다. “그대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그대가 지금 나에게 구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냐” 이에 혜능이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일부러 멀리 와서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오조는 꾸짖듯이 말한다. “그대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 출신이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이에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승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했다.

오조가 원하는 답이었다. 혜능은 일자무식(一字無識)에다 출가도 하지 않은 행자며, 한족 주류가 아닌 ‘외국인’이었다. 세속으로 치면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사람을 인종, 종교, 출신성분, 경제 사회적 지위로 보면 혜능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성의 관점에서 보면 혜능이나 좋은 가문에 학문이 출중하고 수행력도 뛰어난 신수와 차별이 없다. 

이에 대해 광덕스님은 이렇게 풀이했다. “본성이 불성인 불성인간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거나 특별히 수행한 사람이거나 어떤 권능자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무 장사해서 부모 봉양하던 지식 없는 한 노무자가 불성인간을 확증했던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사회적인 어떤 차별에도 상관 없는 불성인간이라는 근원적 실상(實相)이라는 것이다.”

선(禪)은 인간이 본래 완전무결하고 평등하며 주체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불교가 타락하고 승려가 부패했다는 것은 인간의 평등성 절대성을 증명하고 이를 사회에 알리고 교육해야 할 불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즉 당대 불자들이 불교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세속처럼 인간을 출신 성분, 사회 지위, 경제적 여건에 따라 차별하고 배척한 것이다. 

선이 말하는 불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고 그 스스로도 그처럼 행동하지 않은 결과가 불신받는 불교다. 그래서 역대 결사는 선에서 말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모든 지향점을 둔다. 

당대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마다 선이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성(同時性)이다. 불교의 많은 사상도 그렇지만 대개의 종교가 현재의 불행을 감수하고 행복을 유예한다. 그러나 선은 ‘지금 당장’ 실행하라고 압박한다. 

정혜결사문을 보자. “시방세계란 곧 허공과 같아 전부가 부처의 경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나 중생의 마음과 그 경계가 합쳐지는 것이 마치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것이니, 부처가 있고 없음의 세계를 말하지 않으며, 상법(像法)이나 말법(末法)이 있음도 말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항상 부처님이 출현하며 항상 정법이라는 것이 요의경(了義經, 절대 진리를 말한 경)이고, 더러운 세계나 깨끗한 세계가 있다거나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안 계시는 곳, 또는 상법과 말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요의경(不了義經, 진실의 세계로 유인하는 방편의 가르침)이 된다 하였다.” 

선은 이처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미 완성된,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대로 행동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구원자이니 나를 믿고 따르라’가 아니라 ‘네가 바로 부처이니 지금 당장 부처로 생각하고 행동하라’하니 실천에 옮기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주저할 핑계도 없다. 

화두(話頭)도 따지고 보면 지금 당장 부처로서 행동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나를 재촉하고 다그치는 꾸짖음인지 모른다. 멱살을 잡고 “일러라 일러라”고 할을 하고 죽비로 내려치는 까닭은 무엇일 까? ‘이미 완벽한 존재인데 그대로 행하면 될 것을 무엇을 망설이고 자꾸 의심하느냐’는 스승의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 까? 

단순 명료한 선의 가르침

그리고 단순 명료하다. 불성을 깨치는데는 문자를 몰라도 되고 불교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아무런 조건도 예비 단계도 준비할 것도 없다. 숭산스님은 그래서 “오직 할 뿐” 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불교를 전파한 이래 유식 중관 화엄 공 등 많은 교설이 등장하지만 선은 혁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간단하고 명료하기 때문에 선으로 비추면 진짜 불교, 진짜 수행자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이 불교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구원책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지난 60년은 선을 대중화 하고 선으로 장엄하는 시간이었다. 제도개혁, 역경, 승려교육, 신도포교, 복지 등은 모두 자신의 불성을 일깨워 부처로 즉각 살도록 하는 수단이다. 이를 위해 해인총림을 시작으로 송광사 통도사 수덕사 등 총림을 개설했다. 수많은 선원이 들어서 결제 때 마다 3000여명의 수좌들이 화두를 들고 정진한다. 6년 폐관정진 무문관을 세워 서로 들어가려고 경쟁을 했다. 총무원장 종회의장 등 행정소임을 마치고 공식처럼 선원을 들어가 좌복 위에 앉았다. 

그런데 왜 한국불교 위기가 만연하고 또 결사를 외치나? 지난 60년간 선을 받들고 선을 앞세우고 지금도 수많은 선원에서 수천의 부처가 정진하는데 왜 또 결사가 필요한가? 무엇인가 놓치고 잃어버렸던 것은 아닐 까? 선을 잘못 이해하고 그릇된 길을 가지 않았나? 그래서 창간 60주년을 맞는 불교신문은 광덕스님의 말씀을 되돌아 본다. 

“선은 그릇된 이기적 눈을 돌려 자기 본분지에 사무치게 하고 세계와 역사를 자기 생명 속에서 관통하는 눈을 열어준다. 이런 점에서 선은 영원한 인간회복의 바른 길이다.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지혜를 여는 길이다. 세계와 중생 위에 진리의 꽃을 가득 피우는 보살의 땅인 것이다”(1980, 선관책진)

[불교신문3547호/2020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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