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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스님의 간절한 염원 새겨진 ‘화엄종찰’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⑤ 영주 부석사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전경.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영풍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지난 6월30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영주 부석사를 비롯한 전국 7개 사찰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한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게 됐다.

세계가 인정한 부석사는 경북 영주 부석면에 위치한 16교구본사 고운사 말사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지형 가람이다. 산 구릉에 사찰이 건립됐음에도 산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산과 잘 어울려 사찰이 서 있다. 그래서 부석사가 서 있는 봉황산이 더 멋있어 보인다. 사람이 만든 절이 자연과 어울려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전체인 것 같기도 한다. 곧 부석사는 봉황산과 ‘하나 속에 전체인 듯, 전체 속에 하나인 듯’ 존재한다. 이 사찰을 창건한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처럼.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담겨 있고, 온갖 우주도 한 티끌 속에 담겨 있듯 산과 절은 하나’인 듯 전체인 듯 서 있다. 화엄종찰답게 경사지에 여러 개의 대석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터를 마련해 폭은 좁으나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가람을 구성했다. 따라서 부석사는 입구부터 가장 뒤쪽 무량수전에 이르는 진입축이 구성축이 되고, 진입축 선상에 천왕문과 범종각, 안양루가 위치해 가람의 영역을 3단계로 나누고 있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신라를 이룬 문무왕은 분열된 삼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의상스님은 문무왕 16년(676)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가람배치 속에 새로운 세계관을 상징하는 글자 하나를 숨겨 놓았다. 화엄종을 나타내는 글자이자 빛나는 극락을 상징한 글자인 '빛날 화(華)'. 가람과 공간 배치 하나하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세워진 부석사는 통일신라의 아픔을 화엄 9품 정토사상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의상스님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창건 후 의상스님은 이 곳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됐다. 특히, 의상스님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스님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부석사와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3월3일 치르는 의상대재.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스님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의상스님의 제자 신림스님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스님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해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됐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17호인 석등이 경문왕 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부석사에서는 신라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러졌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했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곳으로 발전했고 스님이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더불어 고려시대에는 부석사를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 정종 때 결응스님은 부석사에 머무르며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사찰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곳에서 입적했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부석사의 주지로 임명돼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이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했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조성했다.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됐으며 선조 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했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스님이 안양루를 중건,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개금불사를 진행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됐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 개금불사를 마쳤다.

이어 일제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했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됐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내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부석사는 창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해동 화엄종의 최고 사찰이라는 종교적 중요성도 갖는다”면서 “특히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희귀한 고려시대의 목조건축을 두 채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희소성과 함께 터를 고르고 정리하는 안목부터 거대한 자연에 대응해 종교적인 감동의 장소를 구현한 건축적인 구성의 뛰어남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영주 부석사 대표 성보문화재인 무량수전

 

무량수전에서 국사비까지…성보 간직한 보물창고

■ 부석사 소장 성보문화재

고려시대 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조사당, 조사당 벽화, 석등,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국보 5점과 보물 6점, 도지정유형문화재 2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전국에 남겨진 고려시대 목조건물을 열 손가락 안에 꼽는데, 부석사에만 두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는 점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특히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의 연대가 확인되기 이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다. 고려 현종 때 중창한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성이지만, 내부공간은 정면과는 직각 방향으로 구성돼 중심불인 아미타불이 진입축 방향인 남쪽을 향하지 않고 서쪽 측면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교리적 재현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고려 주심포식 건물의 전형으로도 가치가 높다. 꼭 필요한 부재들만으로 이루어진 공포와 서까래를 노출시킨 내부의 연등천장에서 고려 건축이 추구했던 구조미가 잘 나타난다. 도한 뚜렷한 곡선의 배흘림기둥, 솟음과 쏠림 등의 섬세한 조절 기법, 완벽한 비례를 가진 입면과 내부공간 등 한국 목조건물의 고전이요, 대표작으로 꼽을 만 하다.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여기에 무량수전에 봉안돼 있는 국보 제45호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이어 제작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불상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소조상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량수전에서 동북쪽으로 100m 가량 오르면 의상스님의 진영을 모신 국보 제19호 조사당을 만나볼 수 있다. 1918년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377년(우왕 3년)에 지어진 순수한 고려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는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삼층 석탑은 보물 제249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이밖에도 국보 제17호 석등, 보물 제735호 고려 각판,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 보물 제220호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경북유형문화재 제127호 원융 국사비 등 부석사는 수많은 성보문화재를 간직한 보물창고다.

 

장욱현 영주시장

기고 / 부석사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보존방안

영주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무려 1342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며 한국 불교의 정수를 담아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전통사찰이다. 사찰 내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5점의 국보와 보물 6점, 도지정유형문화재 2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종교가 시대를 초월하듯 부석사는 현대에도 살아있는 우리나라의 문화 그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 부석사가 세계적으로 소중하며 전 인류가 함께 보존하고 관리해 후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훌륭한 문화유산임을 인정받은 결과라 생각하니, 앞으로 보존과 계승에 더욱 힘을 써야한다는 무거운 책임감도 함께 느껴진다.

부석사가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부석사의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음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자긍심 고취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됐다. 이번에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등재하면서 등재이유로 7세기 이후 한국 불교전통을 현재까지 이어오는 종합승원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고, 개별 유산의 진정성, 완전성, 보존관리계획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으로 인정했다.

이와 더불어 유산의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사찰 내 모든 신축건물 계획 시 세계유산센터에 신고하도록 하고 관광객 증가에 대비한 대비책 마련도 같이 권고했다. 영주시에서는 부석사의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등재선포식과 산사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부석사와 협의해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증가하는 관광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주차장 확보 등 적절한 대책도 아울러 세울 계획이다. 여기에 부석사에 이어 소수서원도 전국 9개 서원과 같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으로, 예정대로라면 2019년에 등재결정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주는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도시다. 특히 수많은 선비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비정신을 품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영주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고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문화의 보존과 계승은 물론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앞장서도록 노력할 것이다.

영주=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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