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④ 해남 대흥사

'아홉 굽이’ 구림구곡을 지나 해탈문을 들어서면 남도의 명산 두륜산을 품은 대흥사가 펼쳐진다. 고생 끝에 만난 찬란한 비원 같다. 대흥사는 서산대사로부터 초의선사로 이어지는 선풍과 차문화, 호국사상을 올곧게 유지하고 있는 대표도량이다.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남도의 애환’ 세계인 마음에 심는다

대흥사는 조계종 제22교구 본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지 승원’ 7곳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 끝자락 드넓게 펼쳐진 나주평야를 지나 불쑥 솟아오른 두륜산 깊숙한 곳이다. 산문에 들어서고도 굽이진 산자락을 아홉 번을 지나서야 일주문을 마주할 수 있다. 구림구곡(九林九曲)을 지나는 길은 울창한 편백나무숲이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문화재청은 이 곳을 명승으로 지정해놓았다.

해탈문을 지나면 드넓은 분지다. 울창한 숲을 지나니 드넓은 공간이 펼쳐져 고생 끝에 마주하는 찬란한 비원을 대한 듯하다. 대흥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공간배치부터 특이하다. 남원과 북원, 별원으로 나뉜 세 개의 공간이 도량을 이뤘다. 북원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으로 구성됐다. 별원은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등으로 이뤄졌다.

대흥사 편액에 얽힌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대흥사를 다녀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흥미롭다.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조선의 두 명필가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사찰은 대흥사가 유일하다. 북원의 중심 건물 대웅보전에 걸린 편액은 2행 종서로 원교 이광사가 썼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귀양길에 대흥사에 들러 이 편액을 보고 역정을 내며 현판을 새로 써줄테니 떼어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귀양길을 마치고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과거 자신의 교만을 반성하며 원교의 편액을 다시 걸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 몇걸음을 사이에 두고 이광사와 김정희의 글씨로 새겨진 편액을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다. 천불전과 침계루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다.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의 글씨도 있다. 남원으로 드는 가허루 현판의 글씨다.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던 창암은 유배길에 오른 추사 앞에 자신의 글씨를 내놓았다. 추사는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창암의 글씨를 비꼬았다. 창암은 모욕감에 분노하는 제자들을 달래며 추사를 일러 ‘글씨를 아는지는 몰라도 묵향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유배생활 동안 새로운 눈을 뜬 추사는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추사는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썼다.

정조(1752~1800)의 글씨도 있다. 표충사 편액이 정조 임금이 하사한 작품이다. 이광사와 김정희의 글씨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 표충사로 자리를 옮겨 국가제향으로 치러진 서산대제의 역사를 알아야 대흥사를 바로 알 수 있다. 불교의 호국사상이 서산대제를 통해 구현됐다.

표충사는 엄밀히 따지면 사찰이 아니라 사당이다. 그것도 유교식이다. 사찰 안에서 유교식 사당을 만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와 함께 국가가 주관한 제향이 봉행된 장소다. 정조는 국난에 분연히 일어났던 의승군과 승장을 기리기 위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대흥사에 표충사를 세우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제향을 국가가 주관해 엄수토록 했다. 국가제향은 일제강점기 역사왜곡과 함께 단절됐다. 일제가 저지른 또하나의 만행을 표충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 염주, 법라, 호패 등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대흥사는 풍담스님으로부터 초의스님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종사와 대종사와 만화스님으로부터 범해스님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한국불교의 사상과 정신을 세운 선사들의 업적을 부도전에서 만날 수 있다.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현판이 일주문에 걸려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표충사의 호국사상에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불교사상이 더해진 도량이 바로 대흥사라 할 수 있다. 다성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도 13대종사의 일원이다.

초의선사는 오늘날 대흥사를 차문화의 성지로 불리게 한 장본인이자 서산대사와 함께 대흥사의 상징같은 스님이다. 산내암자 일지암에 주석하며 다선일미 사상을 주창한 <동다송>을 펴냈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대흥사는 초의선사의 다선일미 사상을 기리고 차인들의 교류를 위한 초의문화제를 매년 열고 있다.

대흥사는 사적 제508호로 지정돼 있다. 두륜산 대흥사 일원 또한 명승 제66호다. 대흥사 자체가 곧 문화재라는 의미다.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과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 보물 제1807호 천불전, 보물 제1552호 영산회괘불탱화 등 보물 8건, 시도유형문화재 5건, 문화재자료 3건 등을 보유하고 있다.

대흥사에서 1시간여 거리에 있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을 올리는 천인상이 함께 부조된 여래좌상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형태에 있어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마애불상 중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적으로도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가치가 높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대흥사는 국가제향으로 봉행되던 서산대제를 복원하고 국가에서 파견한 예제관 행렬을 재현했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조선 후기 선불교 논쟁이 있었다. 수선을 강조한 백파선사와 교와 선이 다르지 않다는 초의선사의 주장이 맞서며 오늘날의 선풍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백파선사는 <선문수경>에서 선을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분류한 삼종선 이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초의선사는 <선문사변만어>를 내고 조사선과 여래선에 차등이나 우열이 없다며 조사선을 최고의 선법으로 본 백파선사의 주장을 논박했다. 이 논쟁은 양측의 제자들과 추사 김정희가 가세하면서 100년 넘게 이어졌다. 바로 그 현장이 동국선원이다.

동국선원은 초의선사가 서산대사의 선풍을 이어 개창했다. 원래 남원 영역인 천불전 뒤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관람객들로 소란스러운 일이 많아져 표충사 뒤편의 대광명전으로 옮겼다. 이 건물은 초의선사가 추사의 방면과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다. 이 건물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추사는 동국선원 현판을 직접 썼다.

초의선사와 추사가 주고받은 서신에 두 사람의 애틋한 정이 묻어난다. “초의 안녕하신가? 초의선사 보고 싶으니 간밤엔 눈꼽이 다 끼었나니 그 청량하고 고고한 모습 한번 보기 원하나니. 그러나 불사에 바쁜 몸 어찌 욕심 내겠는가 원컨대 초의가 만든 차(茶)라도 보내주시면 초의 대하듯 ‘초의차’ 만지고 어르고 혀끝으로 음미하리니 이보시게, ‘초의차’ 떨어져 ‘초의차’ 못 마시니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느니 그러니 ‘초의차’ 보내지 않으시면 내 당장 말을 몰아 일지암으로 향하여 차밭을 모두 밟아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의차’에 중독시킨 죗값 응당 그대의 몫이려니.”

“추사에게, 어허허, ‘초의차’에 환장한 사람이구만. 마치 양귀비에 중독된 사람처럼 분별없이 글을 쓰셨구먼. 천하에 추사도 ‘초의차’ 없으면 맥 못 쓰고 꼬리 꺾이고 마는구먼.”

동국선원은 최근 대흥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소다. 문재인 대통령이 젊은 시절 이곳에 머물며 사법고시를 준비한 일화가 알려져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대흥사는 이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만행을 떠나면 일반인들에게 특별히 개방하고 있다.

대흥사 주지 월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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