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부문 대상 최문영 씨

9997배. 9998배. 9999배.

팔다리의 느낌이 이미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져도 그날, 그날들에 대한 기억은 아주 또렷하다. 내 등짝이 딱딱한 구들장 같이 변하게 된 그날들. 바로 앞에 가지런히 놓인 방석이 이미 젖을 대로 젖었다. 무릎에 온 몸을 싣고 낮게, 더욱 낮게 낮추지만, 낮아지는 건 늘 방석이었다. 그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용서는 늘 하늘로 증발해 버리고, 내게 남는 건 아래로 물처럼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깥에는 비가 내린다. 등에는 또 다시 거북 등껍질이 매달린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서빙고 고문실 안에 있던 나에겐 분명 비가 내렸다.

“무릎 꿇어!”

그게 시작이었다.

“무릎은 왜 꿇는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짜고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두 놈이 나를 번쩍 들어 유도선수처럼 반대쪽으로 집어 던졌다. 모래 자루처럼. 그러면 반대편에 있던 자들이 나를 받아 정강이를 또 걷어찼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또 다시 반대쪽으로 내 던졌다. 그러다 혼절할 때쯤 되었을 때 나에게 각목이 날아들었다.

“야, 이 새끼야, 너 같은 애들, 죽여도 개 값이야. 20만원에 장례 치워버리면 그만이야.”

딱히 조사하는 것도 없이 무조건 몽둥이질을 해대던 한 군인이 심심했는지 힘들었는지 나를 향해 악을 써댔다. 그러고는 다시 몽둥이 매질이 시작되었다. 몽둥이로 시작해서 몽둥이로 끝나는 하루. 목 아래부터 궁둥이까지 온 몸이 진득진득하니 먹탕이었다.

고문실에 도착한 어떤 날은 물주전자가 나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들은 태연히 물 주전자에다 고춧가루를 세 컵 넣고는 후춧가루를 넣었다. 그런 후 빙초산을 대검으로 뚜껑을 딴 후 넣었다.

뭔가 어제와는 다른 고문이 기다리겠구나, 온 몸의 세포가 두려움으로 가득 번지기도 채 전에 그들은 셋이서 나를 덜렁 들었다. 두 사람이 내 양쪽을, 한 사람이 두 다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메치듯이 눕혔다. 자해할까봐 혁대도 없는 군복을 입은 나는 낡디 낡은 진진초록 쓰레기봉투에 싸여진 짓뭉개진 생체였다. 신고 있던 고무신짝이 벗겨져 나뒹굴 때 나는 양철로 만든 책상 위에서 한쪽으로 고개를떨군 채 넝마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내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신속하게 손과 온몸을 끈으로 묶었다. 양 손목 동맥과 발목 동맥에는 나일론 같은 전기줄을 테이프로 붙였다. 그러고는 전기를 돌렸다. 그 순간 찌릿찌릿한 전기에 저항하면서 내 몸은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 오그라진 새우, 불 위에서 구워지는 불그스름한 새우, 그것이 그 순간의 나였다.

그런 후 그들은 내 입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 속에 담긴 복잡다단한 물을 코에 들이부었다. 순간 숨이 막히면서 ‘꼴까닥’ 기절해 버렸던 것 같다. 한참 후 다시 정신을 차리면 또 다시 그들은 같은 고문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칠일 째 되던 날, 세 놈이 나를 꼼짝 못하게 껴안고서 내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 강제로 인주를 묻혔다. 그러고는 또 한 사람이 들고 있던 확인서에 인장을 찍으려 했다.

“읽어 보고나 찍읍시다.”

“이 새끼야, 뭘 읽어 봐? 이놈의 새끼!”

그 상황에서 찍은 인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물어본 것이나, 되돌아 온 건 욕설과 주먹질이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확인서에 인장을 찍었다. 심문 없이 고문으로 흘러간 시간의 끝은 그들이 만든 조서에 강제 확인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그날 알았다. 내가 거기 왜 들어가서 왜 그런 고초를 겪는지를. 나의 죄는 바로 ‘무고죄’였다. 김각경과 김홍기, 나대홍 스님이 나와 다른 방에서 나처럼 고문을 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각경과 김홍기까지라니!

 

그들은 정보부 직원들이었다. 그들을 만난 건 소위 10.27 법난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 1980년 10월 27일의 두 달여 전쯤이었다. 중앙정보부 김홍기라는 사람이 썼다는 종이 한 장을 김각경이 들고 찾아 왔었다. 안양에 있는 조그만 절에 설법을 하러 가야 했기에 급한 마음도 있고 해서, 못 하겠다, 잘라 말했다.

“중정에서 써 가지고 온 거니까 찍으세요.”

“못 하겠다. 쓰면 내가 직접 쓰지.”

“급합니다. 찍어 주기만 하면 되요. 빨리 국보위에 넘겨야 해요.”

여러 말이 오가다 시간도 없고 해서 한 번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종정 직무대리를 윤고암 스님이 하고 그분 상좌 스님이 적법하게 총무원장 하는 데, 송월주가 와서 들어낸 것은 불법이다.’

첫 번째 내용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또 10년마다 한 번씩 승려 분한 신고를 하는데 송월주가 이 판국에 분한 신고를 실시한 것은 불법이다. 분한신고 비용으로 경비를 마련하려는 의도이다.’

두 번째 내용이었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내가 모시던 이서옹 종정 스님을 생각하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 스님을 대신하여 일하던 분이 고암 스님이었다. 더구나 승적 관리를 위해 분한신고를 하도록 하면 신고자가 비용을 내야 했고, 그 돈을 모두 합하면 제법 큰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굳이 송월주 원장 스님을 상대로 진정서를 제출할 마음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사실 그대로 적어온 것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두 번 생각지 않고 도장을 찍어줬다.

그러더니 또 다시 김홍기란 사람이 중정에서 시켰다며 김학태라는 사람을 보냈다.

“지난번과 같은 내용이에요. 그때는 육필이었고, 이것은 타자로 친 거예요. 어차피 찍어 주셨으니, 이것도 좀 찍어 주시죠.”

부탁인지 당연한 요구인지 모를 말투였다. 분명 내가 이미 도장 찍어준 진정서와 내용은 같았다.

특별한 일이 있겠나 싶어 그냥 찍어 줬다. 그것이 무고죄의 원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먼저 찍은 종이를 찢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냥 내버려 둔 것도 문제였다. 진정서 건수만 늘렸다. 그 후 그 두 장은 늘 별개의 진정서로 따라다녔다.

당시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 지구가 일곱 번 반이 쪼개지고 열 번 반이 쪼개지더라도 나는 분명 사실에 도장을 찍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진정서를 냈다면, 그래서 그 꼴을 당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았다.

10월 27일 그 일이 있기 직전까지 상도동 백운암에서 서옹 스님을 모시고 있었다. 사건 직전 느낌이 좋지 않아 홍제동 홍운암으로 피신을 했다. 그리고 2차 검거가 있던 10월 30일 그들에게 잡혔다. 아침 6시 40분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그날 밤 9시 30분에 50사단 수사대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고문은 시작되었다. 지하실에서 그들이 말하는 뺑뺑이 의자를 탔고, 이튿날 10월 31일부터는 서빙고로 들어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이 모든 정황을 고려했을 때, 그들이 말하는 무고죄가 맞다면 최소한 고소 상대방들을 심문한 이후가 나에 대한 체포 시기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고소 대상자들과 같은 날 체포 대상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던 것처럼. 게다가 어떠한 취조나 심문조차 없었다. 고문만 있었을 뿐. 그러고는 무고죄라는 확인서에 강제 인장을 찍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은가! 재미라고 보기엔 너무 고통스럽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자신이 몸담던 조직을 빌미로 얼마든지 빠져 나갈 수도 있을 법한 사람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 버려지다니. 그 필요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분명 그들은 나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거대 악에는 늘 공통으로 붙어 다니는 그 이념에 그들도 희생됐던 것이다.

 

무고죄로 구속되고 한 달여쯤 지났을까. 월주 스님이 나를 찾아왔다. 종정 중심제를 옹호하던 나와는 달리, 총무원장 중심제를 지지했기에 나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월주 스님. 자의로 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쓴 나. 우리 조계사를 법적으로 이기고 합의를 거쳐 승자가 된 개운사의 대표였던 그가 조계사를 접수하던 날이 잠시 떠올랐다. 무상함이 어색한 기운을 누르며 나를 침전시켰다. 그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총무원장이 되고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조계종을 만들겠다 선언했었다. 그런 그를 서옹 스님을 모시던 다른 스님들이 훼방을 놓았다.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잡은 신군부와 친분이 있던 몇몇이 서옹 스님의 종정 복권 준비를 위해 로비를 한 것이다. 월주 스님이 문화공보부에 총무원장 등록을 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번번이 무마시키며 지연시켰다. 누구는 그것을 두고 정부가 그를 김대중 노선으로 찍었다는 둥 호남지역 출신 인사라 반대파가 있다는 둥 여러 말을 했지만, 사람들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어쨌든 그를 고발했던 나는 구속되어 있었고, 그는 별다른 고문 없이 훈방 조치되어 풀려나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보안사의 압력으로 총무원장 자리를 사퇴했다는 것만은 풍문으로 들었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는 저쪽에서 내 얼굴을, 나는 이쪽에서 그의 장삼 옷자락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그때 왜 자체 정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이런 일들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내 질문이 먼저 담담하게 날아갔다.

“정화할 것 없어. 정화할 것이 있어야 정화를 하지.”

그의 선문답 같은 말속에서 이제야 그를 읽을 수 있었다. 정화할 대상이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수행하는 자로서 누가 누구에게 정화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말임을.

“그럼 그런 답이라도 정부에 진심으로 전달했어야죠.”

“나에게 전두환 대통령 추대지지, 라고 해서 주요 신문에 내래. 물론 나는 못하겠다고 했어. 그런 사람이 수장인 정부에 무슨 전달을 해!”

순간, 그렇게 해서라도 살았어야죠,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으나 그 앞에서 그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비굴하게 비춰질 것만 같았다. 쿠데타로 상관을 찍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 총과 각목으로 위협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스스로 고개를 숙이라 할 뻔 했으니.

“그나저나 한영수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이 되었답디까?”

한영수는 우리 불교와 관련된 문공부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있던 빙고 호텔에서 거의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뻔하지 뭐. 뇌물죄 운운했지만 나온 것이 없잖아. 내가 전두환 대통령 추대지지 거부하고, 그들이 원하는 정화 거부해서 우리가 이 꼴을 당했는데. 그래서 나라 지켜야 할 군인과 시민 보호해야 할 경찰들 몇 만 명 데려다가 온 사찰을 군홧발로 짓밟고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불교가 온통 비리 투성인 것처럼 신문들에 온 사방 도배를 했는데, 나온 게 있어야지. 그러니 엮은 거지.”

“엮다니요?”

순간 엮였다는 말에 숨 줄기가 긴장하며 백두부터 회음까지 똑바로 섰다.

“그렇지 않아? 윤월 스님이 날 고발했다며? 내가 밉기도 했겠지. 하지만 난 스님이 그랬을 거라곤 생각 안 해. 다 그들이 잘못했지. 그랬으니 사건 당일 우리를 잡듯이 스님을 잡으려 했겠지. 아마 나와 몇 사람들을 미리 사전 조사 했던 것 같아. 어차피 나를 잡아봤자 나올 것은 없을 테고. 그러니 이런 시나리오라도 미리 만들었겠지.”

그럼 결국 이런 사태를 만들면서 여러 대응 방법 중 하나로 나를 희생시켰단 말인가, 어이없었다. 조계종 자체의 내분으로 결론짓기 위해 나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분을 봉합하지는 않고 이쪽저쪽 다니며 뇌물이나 받고 분규를 조장했다는 명분으로 한영수를 엮은 것이고.

“그럼 결국 조계종 자체의 내분이 원인이란 말인가요?”

“그들 주장은 그래. 하지만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모두 당했어. 여기 오기 전 해운 스님을 만났는데, 청주교도소에서 석암 스님을 보았대. 천태종 총무원장 하던. 얼마나 맞았는지 목에서 검은 액체가 어깨를 타고 팔을 타고 흘러내리더래.”

그런데 훈방 조치되어 자유의 몸이면서도 어째 나보다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들으셨어요? 태고종의 누가 들어왔는데 금방 나갔대요. 태고종은 원래 결혼하고 뭐하고 해서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기에 대상이 아니랍니다.”

다소 격앙된 내 목소리에 월주 스님이 다소 단호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그때 보안사 직원으로 양근하가 있었지. 태고종 스님 아들. 그가 지켰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비구 스님들을 보호한다면서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야. 깡패까지 동원해서 대처 스님들을 내쫓고 사찰을 빼앗았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그분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사실 그랬다. 일제 강점기가 되어 비구 스님 전통은 끊어져갔다. 일제는 민족문화의 하나인 한국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 대처스님 제도를 만들어갔다. 종교를 만만하게 부리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전국에 본사와 말사 제도를 도입하여 체계화시켰다. 좋게 말해 체계화지, 사실 총독부의 엄격한 통제아래 놓으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외래에서 유입된 대처 전통을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처럼 한꺼번에 휩쓸어버리려 했다. 그 과정에서 깡패라는 종교적이지 못한 단어가 들어왔고, 가끔은 그냥 뒤엎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이 실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깡패 같은 전통을 박정희 대통령이 이어갔다. 순전히 만만한 불교로 만들기 위해서. 전두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선상일 뿐이었는지도.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지배를 넘어서, 정당하지 못한 자신의 정권 쟁취과정을 사회정화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하는 데 불교를 희생자로 삼으려 했다는 점 정도가 다르다고나 할까. 그리고 법난이 일어날 그 즈음, 태고종은 또 다시 법적으로 조계종에 몇 개의 사찰을 빼앗겼다. 양근하 소령, 참으로 악랄했다고 평가받는 그 보안사 요원은 어쩌면 자기 종파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업이 업을 나은 것인가.

“역사라는 물줄기는 모든 선인과 악인을 품고 흐른다네. 불교를 적극 장려했던 역사상 임금들 중에도 세속적으로는 더 없이 악인인 이들도 있었지. 내가 이런 말할 자격은 없지만, 모든 이 안에 불성이 있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생각해 보세. 우리가 불성이 있는 누구를 감히 비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정화하라 할 수 있는지를.”

그날 새겨진 물줄기는 출소 후에도 내 안에서 계속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 줄기는 내게 말했다.

‘종교는 권력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힘 있는 자에게 종교는 손과 발일뿐이지만, 힘없는 민중에게 종교는 몸통 자체입니다. 힘 있는 자는 필요에 따라 종교를 버리기도 하지만, 힘없는 자는 위기에 있는 종교를 구합니다. 힘 있는 자에게 종교는 수단이지만, 힘없는 자에게 종교는 목숨이고 신념입니다. 누군가가 미울 때, 그 미움을 그치고 평화를 찾고 싶을 때 기도를 하세요.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는 기도를 하세요. 기도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얻기까지 함께 해 주는 친구입니다. 기우제를 지낸 사람들은 모두 비를 내리게 한다지요. 기우제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소망할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자연스레 미움의 사슬이 끊어질 것입니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따라 끊임없이 돌아가는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새벽나절보다 강하게 하늘에서 비님이 내리신다. 대웅전 처마가 말갛게 하늘 향해 들리었다.

10798배. 10799배. 10800배.

■ 산문 부문 심사평

‘10·27 법난’은 우리 불교계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마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광기와 폭력의 아수라 난장판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불법연행, 강제구금, 집단폭행과 고문…,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깡패 권력이 계엄사령부를 동원해 거룩한 성직자들에게 가한 폭력은 개개인의 인권유린을 넘어 1700년 한국불교의 역사 전체를 모멸하는 치욕 중의 치욕이었습니다.

그 상처와 희생은 너무 큰데, 사태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은 참으로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나라 안팎의 민주시민들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기념관 건립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태의 진실을 규명해 널리 알리면서, 역사의 상처를 치유해 상생과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문예공모전의 취지는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좋은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37년이나 지난 사건이기에,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기보다는 ‘역사의 잊혀져가는 페이지’로 보이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잊지 말자는 것. 한 세대나 더 지난 역사의 후속세대들에 의해서 관찰되는 무참한 탄압의 역사에 대한 불망기(不忘記). 대체로 이런 목소리와 성격을 보여주었습니다.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은 당시의 사건 현장을 직접 체험한 일종의 피해자 체험기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글들과는 달리, 직접 체험이 강점이었습니다. 생생한 체험과 증언은 역사 서술보다 정확하고 섬세하며 감동적입니다. 그것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탄압과 희생만을 강조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대상 작품은 1만800배의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바로 부처님 정법이 아닌가 합니다. 자성과 관용의 기도 수행은 개인 업과 공업(共業)을 함께 씻어내는 승가의 문화전통으로서, 매우 자비롭고 평화로우며 뭇 생명들을 감화시킵니다. 지극한 상선(上善)이요 상승(上乘) 중의 최상승(最上乘)입니다. 권력이나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교의 힘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선작은 서두와 말미의 기도 사이에 37년 전의 치욕과 수난을 재현해 본 내용을 구성합니다. 그 폭력의 생생함, 사건 핵심인물과의 조우, 한국 불교계의 현실에 대한 자성,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끊어낼 수 있는 기도의 힘 등이 주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개인사인 동시에 역사이고, 다큐멘터리이면서 자서전이기도 하며, 상생과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법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융합적 성격이 이 글을 대상으로 선정하게 한 미덕이었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윤재웅 동국대학교 교수

최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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