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대법회 셋째날 혜국스님 법문

'제2회 간화선대법회' 세 번째 법석이 오늘(10월17일) 팔공총림 동화사 통일대불전에서 열렸다. 이날 법사로 나선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스님은 "인삼은 6년만에 캐고 산삼은 보는 즉시 캔다면 수행도 듣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며 "오늘 법회를 계기로 대발심해 번뇌망상이 공한 것을 깨닫고 성불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을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번뇌망상 따라다니느라 나고 죽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 오늘 간화선대법회에 동참하여 모든 죄업을 소멸하고 발심해 참나를 깨닫는 보리심을 발하길 바란다.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공부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빌려온 지식으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많이 안다는 것과 내가 직접 내 인생 만드는 것은 천지차이다. 간화선 조사들이 직접 걸어 올라오라고, 직접 체험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믿음을 깊이 하기 위해 간화종장인 백장스님 말씀을 들어보자.

태어나도 본래 태어난 바가 없다. 죽어도 죽은 바가 없다. 이런 문제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해도 간화선의 장점이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은 본래 허망한 것이요 우리의 생각에만 있다. 우리들의 본질 참된 성품은 어떤 죄업에도 물들지 않아 본래로 원만하게 구족해 있다. 다만 허망한 생각, 번뇌망상으로 인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음이다.

여러분 조리를 가지고 바다로 가보자. 조리를 바닷물 담그면 어떨까. 바닷물이 영혼이라면 조리는 내 몸뚱이와 같다. 조리를 바닷물에 담그면 바닷물이 조리를 흠뻑 적신다. 그러다 조리를 잡아당기면 바닷물이 빠져나간다. 그럼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나. 바닷물은 그 자리에 있다. 우리 본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도 태어난 바가 없고 죽어도 죽은 바가 없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우리 생각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본질은 태어난 바가 없고 죽은 바도 없고, 우리 그릇이 법신의 바다에 잠깐 들어왔는데 그릇 속 에너지를 나라고 착각한 것이고, 그릇이 깨져버린 게 참 나지 아트만의 '나'가 절대 아니다.

허망한 생각을 놔버리라. 컵 안에 물이 있으면 쏟아버리면 되는데, 번뇌망상은 모양이 없다. 있기만 있으면 버리면 되는데, 모양이 없으니 수를 낼 수 없다. 결국 의식전환이 답이다. 공으로 바꾸는 것이다. 공성을 못 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제가 오른쪽 손을 들었다. 이제 왼손을 들었다. 우리 두 눈으로 보면 좌우가 구분되는데, 손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같다. 내가 만든 에너지가 아니다. 내가 빌려 쓴 것이고 떠오른 태양에서 에너지를 빌어다가 내 에너지를 만든 것이다. 내가 빌려다 쓰는 거나 새가 빌려 쓰는 거나 에너지에 관해 우리는 한 몸이다.

이 몸뚱이가 있지를 않는데, 이 몸뚱이가 있다고 집착하면서 '고집멸도'의 고가 생기는 것이다. 어제 저녁 꿈속에서 불을 만났는데, 뜨겁다고 하나 안하나. 꿈속에서 불 만나면 뜨겁다고 하고 물을 만나면 허우적댄다. 아침에 깨면 없는 불이고 물이다. 부처님이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말씀하셨다. 본래 무일물이란 불확정성원리를 넘어선 것이고,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내 몸뚱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우주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게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현실임을 알게 된다. 이론적으로 알면서 행동이 따라오지 않는다. 내 생각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나를 끌고 오기 때문이다. 내가 번뇌망상에 끌려 다니지만 내 본질은 부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호젓한 길을 가는 데 누가 부르면 돌아보게 된다. 왜 돌아보는가. 뒤통수에 눈이 없어서 그렇다. 마음의 눈을 못 떴기 때문에 생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제 본 낙동강은 지났고, 어떤 강물이든지 같은 강물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우리 모습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괴테는 변화하고 진동하는 힘이 내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쉼 없이 변해 가는데 제행무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깨어있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변해가는 내 모습을 알아차리면 제행무상을 절감하고, 제법무아라는 것 또한 에너지를 빌려 쓰는 우리는 독립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 알 수 있다.

저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나이가 칠십이 되니, 새벽 2시에 일어났다가도 비라도 오면 날이 찌뿌둥한데 좀 더 자자하면서 도로 눕게 된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잠을 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유언을 통해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하셨다. 부지런히 노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고 내 안의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오직 모를 뿐' 하고 백지로 돌려놓는 것이다. 이 몸뚱이는 잠깐 빌려 타는 자동차이고, 그릇에 비친 그림자의 달을 나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내 본질은 똑같다. 마음이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내 본질을 오직 모를 뿐 하면 전부다 환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자유라는 열반적정을 믿게 되면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내 습관으로 이를 몰랐다니 분심이 절로 나고, 신심과 의심이 발심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가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내가 한참 신심날 때 그 신심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눈감기를 기원한다. 신심이 더 나은 상태에서 눈 감기를 노력하겠다고 서원한다. 우리 불자들이 본인이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잡아 끌어당기려는 생각 때문에 간화선을 어렵다고만 하는 것이다.

도인은 인생을 바쳤고, 지금은 컴퓨터가 다하고 놀 거 다 놀아서 그런 것 아니겠나. 부처님께서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거나 저 세상에 가셨거나 변함없다고 하셨다. 내 안의 흙탕물 때문에 달을 볼 수 없는 것이지, 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 마음 가라앉히는 것은 나만 할 수 있다. 죽으나 사나 그 길을 가는 것을 발심이고, 발심은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늘 했던 발심을 내일 또 하는 것이다. 그 조사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생생히 살아 있다. 신도들은 간화선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원력을 세워야 한다. 인삼은 6년 만에 캐고, 산삼은 보는 즉시 캔다면, 수행은 듣는 즉시 시작해야 한다. 간화선대법회에서 대발심해 언젠가 모두 간화선 수행자가 되고 번뇌망상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필경 성불하여지이다.

다음은 이날 이어진 즉문즉설을 정리했다.

질문 : 깨달음보다 보살행 먼저 해야 한다는 사람이 한국불교 망친다는 견해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 보살행과 수행은 둘이 아니다. 옛날 스님 수행만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 수행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살행이 없는 수행은 그것대로 외길이다. 반드시 보살행과 수행은 둘 아니고 하나이다. 수행 열심히 하면서 중생 아픔 같이 하고, 보살행 하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 보살행과 수행이 둘이 아닌데, 지금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일제 36년 수행법이 너무 없어서 큰스님이 수행을 강조하셔서 그런 것 같다. 요즘 선방에서 중생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수행 없는 보살행은 더 큰 문제다. 밤과 낮이 같이 있듯이 내 안에 같이 있을 때 해결방법이 나온다. 나 역시 수행하면서 보살행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

질문 : 마음을 내려놓는 공부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답 : 처음 선방에 들어갔을 때 5분도 앉아있기 힘들었다. 내 안에 모를 뿐인 화두를 30%만 채우면 돌아다니더라도 아차 하고 화두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정중일여 하다가 진일보하면 동중일여 하게 되며 마침내 몽중일여 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하루는 제가 깨어있는 시간이 10시간 중에 5분만이라도, 10분만이라도 깨어 있겠다고 원을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 점점 시간을 늘려나가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목표를 너무 크게 잡지 마라. 5분만해도 엄청난 에너지이다.

질문 : 스님은 손가락을 연비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답 : 연비는 못난 놈이 하는 것이다. 손가락 불태운 에너지로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 저는 출가 전 가족들의 기대가 커 모든 가족들 포기하기 위해 손가락을 불태웠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노력으로 수행하라고 한다.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해도 10년을 넘게 공부해야 하는데, 중생이 부처되는 것, 내 안의 악업을 벗어내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내 나이 22세 때라 불뚝 신심으로 손가락을 연비했지만, 불뚝 신심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질문 : 일상생활에서 참선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답 : 깊은 잠에서 화두 놓치는 사람이 어떻게 화두를 들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 모든 일을 내가 이렇게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오늘 일어났다. 여기에 마음을 끄달리지 않으면 숙제 한 것이다. 물들지 않는 마음이 부처인데, 본질에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선택해서 일어난 일, 끄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숙제한 것이다.

질문 : 티비에서 본 스님들은 인자한데 한국 스님들 고압적이다.

답 : 우리나라 스님들이 고쳐야 한다. 저 역시 고치려고 노력 많이 한다. 한국 간화선의 억울함은 지금 질문과 연결되는데, 일본은 2차대전에 패망하면서 세계화를 일찍 했다. 젠을 일본 유럽으로 전했다.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티베트 스님들 나라를 잃고 세계로 흩어졌음에도 티베트 불교를 널리 알렸다. 우리는 한창 세계화를 해야할 때 일제의 식민통치를 당하느라 그만큼 뒤쳐졌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광복 후에는 왜색화된 불교를 정화운동에 전력을 쏟아 부어, 중생 아픔을 보듬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개선해야 할 점이다. 대처비구 싸움 속에서 십수년을 허비하면서 아직 우리스님들이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질문 : 깨달아서 탐착이 떨어졌는데, 상락아정의 락을 얘기할 수 있다.

답 : 눈에 보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있는 벽을 허물어버리면 한 허공이 된다. 이 허공이 그냥 있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아집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질문 : 선이란 모든 차별을 떠나는데 간화선만 표방하나

답 : 무념으로 갈 수 있다면 어떤 법도 괜찮다. 다만 무념에 한번 들어가서 공을 볼 수 있는 것은 모를 뿐인 백지로 들어가서 애를 쓰고, 화두까지도 그것을 의지해서 나가는 것이지 내가 없어지면 화두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수행법 스승보다 간화선 스승이 더 많아서 간화선을 권하는 것이다.

질문 : 참선수행과 기도는 다른 것인가. 

답 : 본래 둘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화두가 잘 안 들렸다. 외우는 것은 자신 있는데 비워내는 것은 어려웠다. 태백산 도솔암에서 생콩이랑 생쌀 구하려고 내다 팔 약초를 짊어지고 장에 가면서도 신이 났다. 아가씨들 보는 즐거움에 신났던 것이다. 반대로 올라갈 때는 죽을 지경이었다. 손가락을 연비하고 수행하러 들어갔지만, 업이 주인이지 원력이 주인이 되지 못했다. 화두를 고집하는 것은 내가 해보니 그래도 이것뿐이라는 생각에서다. 해제만하면 관세음보살 기도를 했다. 밤에 잠을 안자고 목탁을 떨어트리기도 했는데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못 깨달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런데 고요하고 고요한 데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났다. 그렇게 찾을 때는 안 나타나시더니 왜 이제야 나타셨냐고 묻자, 자네 안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시더라. 내 스스로 관음보살을 찾으며 빨리 나타나라고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니 못 본 것뿐이라, 지금은 고요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기도도 무념으로 해야 한다. 기도와 참선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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