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대법회 / 상무주암 수좌 현기스님 법문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가 여는 간화선대법회 엿새째. 오늘(10월20일)은 지리산 상무주암 수좌 현기스님<사진>이 설법했다. 상무주암에서 40여 년간 은둔정진하고 있는 현기스님은 “중생이 부처이고 여러분이 바로 부처”라며 “이런저런 분별을 떠나 자기의 진면목을 보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법문을 요약 정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대면무사(對面無私). 얼굴을 마주 대함에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보는 것이 불법의 요체입니다. 법을 말하는 사람은 법을 듣는 사람에게 즉(卽)해 있습니다. ‘즉한다’는 것은 법을 설하는 사람이 법을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불법은 법을 전하고 법을 듣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사람이 따로 없으니. 설법이라고 할 만한 것도 따로 없습니다. 설할 법이 없는 것이 바로 참다운 불법입니다. 법문을 귀로 듣고 생각을 해서 아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말이 아니라 이 말소리, 사량분별을 떠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이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제불보살과 천하의 선지식이 법을 듣는 사람 속에 이미 앉아있습니다. 삼세제불은 내면이 있기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자리 귀로 쏙쏙 들어가고 있습니다.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싶어 헤아리지 마십시오.

모슨 생명체에겐 시작이 있고 성장이 있고 결실이 있습니다. 천하만물이 인과의 법칙을 떠날 수 없습니다. 불법은 인(因) 연(緣) 과(果)가 전부입니다. 예컨대 씨앗은 싹을 틔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우리는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인(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연(緣)에 즉하는 겁니다. 연에 들어가 연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만 ‘연’이지 이미 그 안에는 인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싹인 연과 열매인 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에 즉해서 과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반야심경>이 이야기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인 따로 연 따로 과 따로가 아닙니다. 이것이 곧 연기성입니다. 법을 듣는 사람과 법을 말하는 사람이 둘이 아닌 아치입니다. 법을 설하는 가운데 들음이 있고 법을 듣는 가운데에 설함이 있습니다.

달마대사는 왜 동쪽으로 왔을까요.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알려고 하는 세태를 바로잡으려고 온 겁니다. 마음에 비친 모든 것은 헛것입니다. 환유(幻有)를 쫓아가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간화선대법회도 환유입니다. 이 법회에 절대 불법이 있지 않습니다. 불법이란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이게 달마스님의 종지입니다. 밥을 먹으면 밥 생각이 떨어지니까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무심이고 불법입니다. 생각이 끊어지면 그곳이 깨달은 자리입니다. 깨달음이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맛이 어떻다거나 물이 찬지 뜨거운 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무얼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겁니다. 이렇게 스스로 아는 것이 반야입니다. 밥맛 모르고 물이 찬지 뜨거운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므로 길가의 보잘 것 없는 풀도 스스로 압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중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법은 들을 것도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기 전에 이미 성취되어 있었습니다. 벌레 한 마리까지도 스스로 불법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불법은 문자나 개념이 아니라면서 중국 당나라 운문선사는 “당장에 부처님을 때려잡아서 굶주린 개에게 먹이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불법이란 부처님을 잡아서 개밥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천하태평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불법은 어떤 형상이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중생이 부처이고 여러분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불법에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달마스님은 지금 자리에 실제로 있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대로 달마입니다. 달마를 눈으로 보려 하고 귀로 들으려 하는 순간 달마는 마왕이 돼버립니다. 불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하고 너무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거대합니다. 그림자가 나인 줄 알고 쫓아다니면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너무 긴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법을 믿는 마음이 바로 도량이고 법당입니다. 법을 한번 들은 인연으로 여러분 모두가 도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스님과 신도들 간의 즉문즉설

문 : 이 세상에서 어떤 지혜를 따라야 합니까?

답 : 선문(禪門)은 지식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문 :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 무슨 뜻인지요?

답 : 목석(木石)에겐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유정물(有情物)인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념(情念)을 여의면 과거 현재 미래도 없어집니다. 그저 이름이 과거 현재 미래일 뿐입니다. 한 생각 안에 무한한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문 : 화두는 이어지는데 도무지 의정(의심덩어리)가 안 생깁니다.

답 : 배가 고프면 밥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도에 대해 배고파하는 간절한 마음이 불법공부의 요체입니다. 그림의 떡에 마음을 빼앗겨 진짜 떡이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으면 만날 배가 고픈 법입니다.


문 : 저의 딸은 교회에 다니고 저는 절에 다닙니다. 한집에 종교가 두 개면 안 좋다는데요.

답 : 불교가 옳다는 것도 망념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다 제도했으면 중생이 없어야 하는데, 왜 우리는 중생인가’하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생은 없습니다. 그냥 이름이 중생일 따름입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중생은 없습니다.


문 : 가족들이 건강하고 사업이 번창할 수 있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답 : 저는 산중에 있으면서 남 걱정 안하고 오로지 내 걱정만 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눈이 있어 보이고 귀가 있어 들리므로 세간 걱정을 좀 하게 됩니다. 젊은 불자가 없다는 것이 한국불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복불교로 전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는데, 굳이 자식까지 절에 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법회 참가자들이 젊은 사람이 중심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 걱정 사업 걱정보다 젊은 불자를 불러모을 고민부터 합시다.


문 : 화두가 잘 들리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답 :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공부라는 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겁니다. 화두를 놓쳤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들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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