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자현스님 - 3. 외국스님들의 처우에 대한 단상

현각스님의 불교비판은 한국문화적인 측면과 한국불교적인 부분을 범범하게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현각스님에게 가장 절실했던 비판의 핵심은, 마지막인 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현각스님의 6개 비판 중에는 국적 차별문제도 존재한다. 2개가 외국인과 관련된 부분인 것이다.
 
나는 외국승려가 장식품일 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지난 수십 년간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많은 부분을 외국스님들에게 배려했다. 그러나 일반사찰에서 스님의 역할은 기도와 불공 및 신행상담과 법문이다. 또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사찰이라면, 해당 주지는 지역의 유지나 기관장과 교류하며 포교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스님들은 언어문제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와 같은 역할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현재까지의 사찰전통 안에서는 외국스님들이 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생각해보라. 말이 어눌한 외국스님이 49재를 지내준다면 신도들의 입장은 과연 어떨까? 또 해당지역의 기관장과 교감이 잘될 수 있을까? 언 듯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사찰에 외국스님의 위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하다. 한국사찰의 구조와 기능은 한국승려에게 맞춰져서 발전한 것으로, 외국스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는 최근에야 대두된 한국불교의 전혀 새로운 화두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현재 외국스님들은, 넉넉한 사찰에 무임승차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
 
자체적으로 자본을 생산하지 못하는 집단은 발언권을 갖기 어렵다. 종교집단은 상대적으로 자본의 문제만으로 발언권의 유무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을 생산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외국스님들의 장식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외국스님들이 좀 더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열심히 배우거나, 종단차원에서 이분들에게 특정사찰을 할애해서 지속적으로 후원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그리 녹녹치가 않다. 선수행을 하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고 머나먼 한국을 찾은 외국승려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주로 배운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측면이다. 또 특정사찰을 할애해 준다고 해도, 이분들로는 유지가 쉽지 않으므로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줘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제는 한국스님들이 외국스님을 모시고 사는 역차별이 현상이 전개된다. 즉 쉽게 해법이 도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현시점에서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고민과 대화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종단도 외국스님들도 모두 생소한 처음 겪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외국스님은 보다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서, 적은 숫자임에도 집단의 필연성이 보다 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조계종이 외국스님들에게는 나름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현각스님이 한국불교를 일거에 싸잡아 비판하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도 초래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각스님은 이번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한국어 부족에 따른 오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미 불붙은 숭례문처럼, 다종교 사회 속에서 한국불교는 거칠게 타오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현각스님의 말처럼, 그것이 오해에 의한 것일지라도 조속히 돌아와서 참회하는 결자해지의 성숙한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이것이 당신이 25년 이상 몸담았던 종단에 대한 예우이자, 도덕적 지성의 책임 있는 태도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