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 통해 본 임진왜란과 의승군 ④ 왜 일본 불교계는 전쟁에 동조했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제갈공명과 같은 역할을 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사이쇼 조타이라는 스님이었다.

이 스님은 일본 임제종의 선승으로 학식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단순히 불교 관련 정책 뿐 아니라 각종 제도 입안 등에 관여했을 정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스님이 수행자 신분으로 전쟁을 옹호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불교인들은 전쟁에 적극 가담했다. 당시 일본 불교계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지방 사찰은 영주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다양한 방법으로 전쟁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명량’은 국민들에겐 지도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한편 불교계에는 임진왜란에 있어서 의승군을 역할을 되새겨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 당시 일본에서 스님들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사진은 영화 홍보 사진.

한국 스님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반면 이웃나라 일본 스님들은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조선 강토를 피로 물들인 전란에 앞장섰으니, 같은 부처님 제자로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비참한 광경을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를 일기로 쓴 교낸스님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일본 불교계가 전쟁을 지지한 까닭은 당시 시대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본은 중앙집권 통치 체제가 아닌 여러 다이묘(大名, 지방의 번주)가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고 권력을 행사했던 봉건영주제였다. 따라서 영지 내의 행정, 사법, 군사, 경제 등의 모든 권한은 일차적으로 다이묘에게 있었다.

군대 동원 역시 다이묘들이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징발하고, 중앙의 쇼군(將軍, 막부의 우두머리)이 다시 군대를 편제했다. 이는 사찰 또한 다이묘의 징병과 출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 하는 구조였다는 것을 뜻한다.

영주 통제하의 당시

일본 불교계와 권력층

밀접한 관계 유지

침략정책 지지

외교 고문으로 파견

기록병 의료병 무장…

“자의든 타의든

적극 협력했던 것은 사실”

지역 사찰들은 다이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가문의 조상을 모시거나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보다이지(菩提寺)라는 사찰을 두고 있었다. 보다이지들도 다이묘의 지원과 통제 속에서 지역 중심사찰로 성장했다.

보다이지 외 나머지 사찰들도 직간접적인 통제 아래 관리되고 있었다. 이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한 가정마다 1개 사찰에 소속돼야 하는 정책을 장려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지역과 사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보다이지 소속 스님은 물론이고 지역 사찰 스님들은 거국적인 전쟁동원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임진왜란에 관여한 스님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쇼군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참전한 다이묘의 브레인이나 외교 고문 역할을 했던 스님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쇼코쿠지(相國寺)의 사이쇼 조타이스님이다. 이 스님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

법 제정, 외교문서의 기초, 학문 및 사원 정책, 국가 법회 등에 중요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의 침략정책을 지지했으며 외교 고문으로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정권 뿐 아니라 이후 에도시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발탁돼 정권 최고 브레인 역할을 계속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부류와는 신분이나 역할 면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스님들이다. 이들은 직접 종군했지만 실제 전투요원이 아닌 기록병이나 의료병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부대의 전황을 기록하고 부대끼리의 연락을 위한 문서작성, 혹은 대외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일은 한문에 능통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계층이 스님들이었다. 스님들 가운데는 한자로 된 의서를 공부해 의술을 익힌 이들이 많았고, 죽은 병사들의 장례나 전승기원 기도 등도 스님들이 했다.

직접 무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한 스님도 있었다. 안코쿠지 에케이라는 스님이다. 이 스님은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부대와 함께 조선으로 출병, 금산전투에서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을 전사시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김춘호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편집위원장은 “사찰 측에서는 징병에 적극 응함으로써 얻어지는 다이묘의 비호나, 반대로 응하지 않았을 때 따르는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전체적으로 일본불교는 침략전쟁에 동참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불교신문3044호/2014년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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