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 통해 본 임진왜란과 의승군 ② 이순신 장군과 생사 함께 한 의승수군

용맹ㆍ지략ㆍ수행 겸비한

스님 선발해 승장 임명

수군이면서 육로요충지도 방위

 

관군의 보충대 예비대 아닌

생명 내던진 돌격대로 나서

거북선 운행에도 참여해

왜선 격파에 활약했을 것

흥국사 유물전시관에 보관된 ‘영취산 흥국사 심검당 중건 상량문’. 1812년 효암충일 스님이 썼으며 의승수군 300여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관객 15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배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승병(僧兵)들이 나온다. 이들이 바로 ‘호국이 곧 호법(護法)’임을 강조하고 분연히 일어선 의승수군(義僧水軍)이다. 의승수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조직했다. 충무공은 임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8~9월경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스님들도 전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영ㆍ호남 지역에서 스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 달 만에 무려 400여명이 모였다.

 

충무공해전에 있어 의승수군의 역할은 지대했다. 의승수군은 자원병이며 군량도 자체 조달했다. 전투임무는 충무공에게 하달 받았지만 승군들의 지휘는 승장이 함으로써 자체 내에 엄격한 체계와 질서가 존재했다.

승장들은 군사적 지휘력 뿐 만 아니라 수행을 겸비한 고승대덕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충무공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스님을 선발해 승장(僧將)으로 임명했다. 순천에 사는 삼혜스님을 표호별도장(豹虎別都將, 표범과 호랑이 같이 돌격하는 승군의 최고지휘자), 흥양의 의능스님을 유격별도장, 광양의 성휘스님을 우돌격장, 광주에 사는 신해스님을 좌돌격장, 곡성의 지원스님을 양병용격장으로 임명하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경상도와의 4대 교통요충지인 도탄, 광양두치, 석주, 순천성 등 영ㆍ호남 경계에 있는 주요 방어 지역에 배치했다. 왜군들이 지상으로 호남을 침범할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수군이면서도 경계지역인 육로 후방 방위에 각별하게 유의했던 충무공은 이 요충지를 지키는 임무를 의승 수군에게 준 것이다다.

의승수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있어서 이 의승 수군에 없었다면 전쟁을 백전백승으로 이끌기 어려웠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선박은 이들 유격대에 의해 번번해 불에 타 부서졌다’는 일본측의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승장들의 칭호가 ‘돌격대(突擊隊)’나 ‘유격대(遊擊隊)’의 대장으로 기록한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의승군은 관군의 보충대나 예비대가 아니었다. 전투 임무를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동타격대’에 해당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기동타격대란 비상사태에 재빨리 출동해 대처할 수 있게 특별한 훈련을 한 부대를 뜻한다.

왜군을 무찌르는데 크게 기여한 거북선도 의승수군들에 의해 운행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거북선은 스님들이 맡은 주요 임무와 유사한 돌격선 역할을 했다. 양은용 원광대 명예교수(호국의승의날 추진위원회 추진위원)는 의승수군의 주요 역할은 거북선 운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살생을 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바로 의승 수군”이라며 “거북선은 재질이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어진 배이기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단결력 있게 빠르게 움직이는 역할이 중요했다. 일본 배를 부수기 위해 스님들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해 돌격하는 임무를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님들이 이런 중요 임무를 맡게 된 배경에는 이순신 장군과의 깊은 신뢰가 작용했다. 충무공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옥고를 치르다 방면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러 가는 도중인 1597년 5월 정혜사의 덕수스님이 이순신 장군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쳤다. 그 다음날 승장 수인스님이 밥 지을 스님도 데리고 왔다.

이순신 장군과 스님들과의 인연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된다. 여수 마래산 충민사에는 옥형스님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스님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배에 타고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이 장군이 순국한 후에도 충민사 사당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운스님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직후 쌀 수백 석을 갖고 와서 남해 노량 바다에서 엄청난 규모의 수륙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불교 이외 이웃종교계나 기타 조직 등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호국활동을 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승군의 숭고한 업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의병장들은 유생이나 후손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추모행사도 열리는 등 제도권 차원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의승군에 대한 평가는 서산ㆍ사명대사 등 일부 스님들에게 국한돼 있을 뿐 아니라, 이름 없이 입적한 수많은 스님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초기 1592년 7월부터 8월 사이 벌어진 금산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부대를 상대로 조헌이 이끄는 의병 700명과 영규대사가 이끈 의승군 800명이 왜군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의병과 승군이 전원 전사했다. 의병들의 시신은 거둬져 700의총(죽은 의병을 기리는 무덤)으로 꾸며져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지만, 영규스님 등 800여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당시 조헌의 제자와 지방 수령들은 상투머리를 한 의병들의 시신은 수습했지만, 스님들의 시신은 거두지 않았다. 양 교수는 “의승군 활동은 휴정스님에서 유정스님으로 이어지는 전국적 세력을 결집한 중앙조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며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 휘하에 의승수군 조직이 활약했던 것처럼 중앙조직과 별개로 대소 단위가 전국적으로 존재했다”고 강조했다.

 

 

“승병 300여명 명단이 사찰에…”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공북루 편액. ‘공북루’라는 글씨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글로 전해지고 있다.

전라좌수영과 가까우면서

광양만으로 통하는 요충지

 

승병들 사용 추정되는

무기 승복 등 20여 점 보관

‘의승수군’의 본영 여수 흥국사


임란 초기, 왜적의 기세는 등등했다. 순식간에 경상, 충청, 경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호남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며 결의를 다졌다.

당시 나라를 지킨 호남의 중심에 여수 흥국사가 있다. 임란이후 300년에 걸쳐 전라좌수영 산하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영이던 주진사(駐鎭寺)이다. 또한 전라좌수영에 가까이 있으면서 작전이 많이 전개된 광양만으로 통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영화 ‘명량’의 전투신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배 위에서 스님들이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이들이 바로 ‘호국(護國)이 곧 호법(護法)’임을 강조하고 분연히 나선 의승수군이다. 의승수군은 충무공이 조직했다. 충무공은 임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8~9월경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승려들도 전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충무공의 장계에 따르면 당시 스님들이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한 달만에 400여명이 모였다.

충무공은 의승수군을 관군아래에 두지 않고 승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출가사문임을 고려한 것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철저하게 이러한 지휘체계를 지키도록 했다.

5개부대로 구성된 의승수군은 관군의 보충대나 예비대가 아니었다. 대부분 생명을 내던진 유격대나 돌격대로 나섰다. 싸움현장에서 자운스님은 이순신의 군사가 되고, 유격대나 돌격대의 편대는 수인과 의능스님이 지휘했다. 또한 돌격선 역할을 하는 거북선은 자운대사가 설계했고, 의승수군이 운행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의승수군은 이순신 해전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 일본전사에도 ‘의승수군의 돌격대에 의해 번번히 패했다’고 한다.

1988년, 흥국사 중창불사 중에 선당과 적묵당, 심검당 등의 전각에서 의승수군과 관련된 상량문이 발견됐다. 그동안 구전되어오던 흥국사의 면모가 드러나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의승수군과 관련된 자료는 현재 흥국사 승병수군유물전시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임란 당시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칼, 창, 철퇴 등의 무기와 승복 등 20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이 가운데 공북루(拱北樓) 현판은 충무공이 직접 썼다고 전한다. 공북루는 북쪽 성문으로 ‘임금이 북쪽에 있으므로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충무공은 수시로 공북루를 찾아 승군을 훈련시켰다. 성문이 사찰의 일주문처럼 있었다는 것은 흥국사가 승수군의 군사체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흥국사는 임란이 끝난 후에도 300여명의 상설조직인 승수군이 주둔했다. 계속되는 왜구와 병자호란 때 싸움에 임했던 것이다.

흥국사는 대웅전과 봉황루 사이에 법왕문(法王門)이라는 독특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법왕문은 300여명의 승수군이 참석하는 의식이 있을 때 계급상, 또는 승가의 위계 질서상 웃어른들이 자리했던 건물로 추정한다. 승수군과 일반대중들은 아래에 있는 봉황루 누각에서 의식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1년, 흥국사 보광전에서 만일염불회가 결성됐다. 흥국사가 승군의 주진사(駐鎭寺) 역할이 약해지고 서서히 불교수행 도량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전라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승수군도 해체되었다.

흥국사는 1195년 고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이 자리에 절을 지으면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이 한다’는 신인(神人)의 말에 따라 비보사찰로 건립했다.

근래들어 흥국사를 찾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흥국사(興國寺), ‘절이 흥해야 나라가 흥한다’.

흥국사 주지 명선스님은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물들이 체계적으로 보존되고 의승 수군이 제대로 조명받을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불교신문3038호/2014년9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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