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대 총무원장 연임하며
종단 안정과 쇄신 기반 마련

승려복지법으로 공동체정신 복원
각종 국가 규제법령 개선에 기여

용산참사 쌍용차 세월호 참사 등
약자의 아픔 있는 현장에 투신

‘상월결사 인도순례’로 새 지평
마지막 원력 ‘대학생 전법’ 계승해야

한국불교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이 졌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상징이자 기둥이었던 해봉당 자승대종사가 1129일 저녁 원적에 들었다. 당신의 삶 그대로가 불교중흥이었다. 스님의 지혜는 고스란히 한국불교의 길이 되었고 행동은 역사로 승화됐다. 33·34대 총무원장으로서 조계종단의 안정과 쇄신에 크게 기여했다. 퇴임 후에는 상월결사(霜月結社)를 이끌며 생의 마지막까지 불교와 세상을 위해 헌신했다. 한겨울 공사장 한복판에서의 상월선원을 시작으로 전인미답의 인도 불교성지 도보순례를 기어이 성취했다. 그 지중한 원력의 힘으로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린 대학생 전법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종단 안팎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정법(正法)에 기운을 불어넣으려 스스로 솔선하고 종도들을 독려했다.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간절한 외침은 남은 사람들의 과제가 되었다.

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해봉당 자승대종사가 11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사진은 상월선원 동안거 정진을 마친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 한국불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사진이다.
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해봉당 자승대종사가 11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사진은 상월선원 동안거 정진을 마친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 한국불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사진이다.

자승대종사는 20091031일 제33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연임을 거쳐 20171030일까지 정확히 8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두 번의 임기를 원만하게 마쳤다는 점만으로도 종단사에서 희귀한 일이었다. 최대 종단의 행정수반이자 한국불교의 얼굴로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소통과 화합그리고 자성과 쇄신.’ 스님이 자신의 약속을 올곧게 지킨 덕분에 세상과 불교는 활력과 희망을 되찾았다. 안으로는 종단 안정과 혁신, 밖으로는 사회통합과 치유에 앞장섰다. 불교의 권익을 되찾고 수행공동체를 여법하고 거룩하게 복원했다. 선거의 폐해도 계파의 다툼도 사라졌다. 재임 내내 우리 사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대종사는 극심한 아픔과 첨예한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맨 먼저 찾아가 손을 잡아주고 말을 들어주었다.

자승대종사는 대중공의를 따른다는 종단 운영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예전의 권위와 강압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다가섰다. 8년 동안 서울 봉은사 직영 전환, 백양사 도박사건, 전 총무원장 의현스님의 사면, 동국대 관련 내홍 등 난제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스님은 모든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등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반대의견을 경청하고 솔직하게 말했으며 비난을 감수했다. 이러한 용기와 끈기에 힘입어 종단은 차츰 투명해지고 신뢰를 되찾았다.

종단 안정이 지속되자 해묵은 숙제들도 풀려나갔다. 재임 8년간 종법령 제·개정 수가 144건에 이른다. 발로 뛰면서 모두를 끌어안은 결과다. 특히 승려복지법 제정으로 스님들이 평생 동안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했다. 사사롭지 않고 오직 불교를 위해 살겠다는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북돋웠다. 종단 차원에서 시행한 재정공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종단을 옭아매던 각종 국가법령의 개정을 이뤄내며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식에서 회향사를 하고 있는 자승대종사. '부처님 법 전합시다''를 선언한 자리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식에서 회향사를 하고 있는 자승대종사. '부처님 법 전합시다''를 선언한 자리다.

총무원장으로서 첫 대외행보는 2009년 용산 참사 유가족 위문이었다. 이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립, 세월호 침몰 등 약자들의 고통과 저항이 있는 현장마다 관심과 지원을 내주었다. 자비와 포용은 이념과 사상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년형을 받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이 비근한 예다. 피아와 여야를 넘어 오로지 종도와 국민 전체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8년이다.

큰스님으로서의 훈향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오히려 더 깊어지고 널리 퍼졌다. 스스로를 고통의 극한으로 내몰면서 일체중생의 고통에 눈을 떴다. 퇴임 직후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無門關) 정진에 들어갔다. 방문은 3개월 내내 잠가졌고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거듭 동안거를 났다. 치열하고 도저한 궁구(窮究)의 인과(因果)는 눈물겨운 결실들을 일궈냈다. 첫 발걸음은 상월선원이다. 자승스님을 비롯한 아홉 명의 스님들이 맹추위 속에서 소음과 매연을 견뎌냈다. ‘하루 14시간 정진, 하루 한 끼, 포기할 시 승적 반납등의 다짐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모든 생명의 몸부림과 아우성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미증유의 고행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새로운 발심과 원력의 공동체인 상월결사가 형성된 계기다. 상월선원의 좌선은 국난극복 자비순례'' '삼보사찰 천리순례라는 행선(行禪)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한국불교사 최초의 기적을 완성했다.

부처님의 발자취가 서린 인도 네팔 불교성지 1167km43일 동안 걸어서 이동했고 완보해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는 사례가 없고 앞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쾌거이자 공덕(功德)으로 평가된다. 힌두교에 눌려 오래 잠들어있던 인도불교가 다시 기지개를 켰고 한국의 불자들은 순례단의 장엄한 안행(雁行)을 지켜보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인도순례 회향식 연단에 선 자승스님은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사자후로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불교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절절한 선언은 불교와 미래와 청년을 동시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대학생 전법으로 연결됐다. 범종단적으로 사부대중을 모아 함께 고민하고 실천에 나섰다. 150억 원이 넘는 대학생 전법기금을 모아두고 스님은 먼 길을 떠났다.

인도순례를 하고 있는 자승대종사. 위대한 행장과 업적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인도순례를 하고 있는 자승대종사. 위대한 행장과 업적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2009년 33대 총무원장 취임 후 첫 대외행보였던 용산참사 희생자 빈소에 조문하는 모습. 
2009년 33대 총무원장 취임 후 첫 대외행보였던 용산참사 희생자 빈소에 조문하는 모습. 
조계종이 세운 아프리카 탄자니아 보리가람 기술대학의 첫 수계식  
조계종이 세운 아프리카 탄자니아 보리가람 기술대학의 첫 수계식  
10월31일 조계종 중앙종회 종책모임 불교광장 간담회에서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을 전하고 있는 모습.
10월31일 조계종 중앙종회 종책모임 불교광장 간담회에서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을 전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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