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2> 정릉 흥천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2> 정릉 흥천사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5.21 11:12
  • 호수 35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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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피로 크게 일어난 北岳의 자랑

초대 왕비 신덕왕후 능찰
최초 조계종 총본산 위상

오랫동안 낙후됐던 사찰
주지 금곡스님 부임한 뒤
서울 主山 북악 최고 가람
흥천사 전경, 오른쪽 현대식 문화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주차장 정면이 대방이다.
흥천사 전경, 오른쪽 현대식 문화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주차장 정면이 대방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 흥천사(興天寺)는 한 때 조계종단의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계륵이었다. 주민들이 무단 점유하고 토지 보상을 노린 업자들이 개입해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 마냥 꼬였다. 종단이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 흥천사는 점차 쇠락해져가고 차라리 팔아 버리자는 극단적 주장까지 나왔다. 손 댈 수 없었던 흥천사가 10여년 만에 천지개벽 했다. 절 이름 그대로 크게 일어났다. 

다시 크게 일어나는 사찰

가람을 일신하고 일으킨 주인공은 주지 금곡스님(총무원 총무부장)이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그림이 더 어렵듯 이미 주택이 들어선 도시 한 복판을 새로 꾸미는 불사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공력을 수십 수백배 더 들여야 한다. 금곡스님은 불과 10여년 사이에 그 큰 일을 했다. 

토지 소유 문제가 풀리고 종단에 등록된 흥천사의 현재는 강북 도심 최고 도량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달라졌다. 2011년 주지 진산식을 가진 금곡스님은 대방(大房)을 중심으로 한 옛 구역을 새로 정비하는 한편, 위쪽에 어린이집, 선원, 요사채 등을 건립하여 적조암 까지이었다.

절 입구 주차장 위 쪽에 7층 석탑을 조성하고 그 아래 지하 2층 지상 2층의 현대식 문화센터를 건립 중이다. 높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좁은 골목길과 경내에 무단으로 들어선 가옥으로 어지럽던 흥천사는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 북악(北岳)과 연결된 불국(佛國)타운으로 변모했다. 

흥천사는 조선 초대 왕비 신덕왕후 강씨부인을 기리기 위해 태조 이성계가 세운 절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녀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한 나라를 호령하고 한 세상을 풍미하는 영웅 곁에는 좋은 집안 출신의 총명한 새 여인이 등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인 듯 이성계도 그러했다. 

이성계는 오늘날로 치면 이주민 집안 출신이다. 북방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武將) 이성계는 남원에서 왜구를 격퇴한 후 고려 정계의 총아로 부상한다. 고려 조정에 기반이 없고 참신했던 이성계를 정도전 정몽주 등 젊고 개혁적 성향의 성리학자들이 고려 최고 권력자 반열에 올렸다.
 

흥천사 인근의 정릉 입구 모습.
흥천사 인근의 정릉 입구 모습.

이 때 이성계는 고려 태조 왕건 외가로 고려의 권문세가인 강씨 집안과 정략 결혼한다.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젊은 두뇌를 곁에 둔 이성계가 권문세가와 결탁했으니 용의 비늘에 날개를 더 한 형국이다. 게다가 그 부인이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성계 보다 20년 연하인 강씨 부인은 예사 여인이 아니었다. 이성계와 강씨가 처음 만나던 일화는 유명하다.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에 있던 여인이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냉수를 급히 마시면 탈이 날 까 염려돼 나뭇잎을 얹었다는 여인의 말에 이성계는 반해 결혼에 까지 이른다. 고려 왕건과 장화왕후와 만남에 등장하는 이 설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강씨 부인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지략과 대담함은 남편이 왕조를 창업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이 무력(武力)과 젊은 성리학자 덕분이지만 강씨 부인의 역할도 대단했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 낙상하여 누워 있는 것을 안 정몽주가 죽이려 하자 강씨 부인은 어머니인 신씨 부인 무덤 곁에서 3년 시묘(侍墓) 하는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위기에서 구한다. 이 사건을 기화로 방원은 정몽주를 없애고 망설이던 이성계도 왕조 창업을 결심한다. 

강씨 부인은 1392년(태조 1년) 8월 25일(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에 오른다. 그리고 장성한 본부인의 아들들을 제치고 나이 어린 본인 소생 방석을 세자로 옹립함으로써 그녀의 꿈이 눈 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마흔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세상은 그녀가 원했던 것과 정 반대로 흐른다. 

이성계는 그녀를 정말 사랑했던 듯 하다. 태조는 죽은 연인을 곁에 두고 싶어, 사대문 안에 능을 짓지 않는 관례를 어기면서 궁궐 옆에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 사찰을 지었다.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貞陵)이라 했다. 그 옆에 지금의 서울시의회건물 자리에 흥천사를 세웠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직후인 1396년 착공하여 이듬해 170여칸에 이르는 대가람으로 창건했다. 

태조의 부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흥천사가 들어서기 전부터 작은 암자를 만들어 매일 아침 저녁 향차를 바치게 하였으며 흥천사가 완공 된 뒤에는 능과 절을 둘러보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돌고 난 뒤에는 왕후의 소생 왕자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냈다. 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가 나야 침소에 들었고 밥을 먹을 때에도 명복을 비는 독경 소리를 들은 뒤 수저를 들었다. 

이성계의 강씨 부인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아들들의 분노는 커져갔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다섯째 방원이 결국 일을 벌였다. 아비가 죽은 서모(庶母)에 정신 팔린 사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배다른 아우를 죽였다. 원하던 왕권을 움켜 쥔 방원은 철저하게 복수했다. 신덕왕후는 첩의 지위로 강등시키고, 정릉은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지난 2005년 복개한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광통교(廣通橋)에서 놀라운 유물이 나왔다. 광통교 다리 끝 받침대로 쓰는 교대석이 정릉에서 나온 신장석이었다. 그 일부는 거꾸로 놓여 있었다.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놓였던 광통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땅에 묻혔다가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다시 드러났는데 정릉을 수호하던 신장석이 그곳에서 나온 것이다.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태종이다. 조선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다리를 받치는 교대석으로 써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강씨 부인을 향한 방원의 분노와 미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600년 만에 드러난 다리 밑 신장이 생생하게 전해준다. 
 

흥선대원군이 건립한 대방.
흥선대원군이 건립한 대방.
42수 관음상을 봉안한 극락보전.
42수 관음상을 봉안한 극락보전.

조선 초기 불교 주인공 흥천사

정릉은 수난을 당했지만 흥천사는 한동안 유지하며 조선 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창제를 돕던 신미대사는 이곳 흥천사에서 창제 작업을 했다. 1424년 세종이 7개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해 흥천사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되었다. 선종도회소는 18개 사찰, 4,250결의 전답, 1,970명의 승려를 관장했으니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 격이다.

세종은 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각을 봉안하고 왕실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관음법회를 연 세종, 죽은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불상과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을 조성해 사리각에 봉안한 세조 등 왕실 후원 아래 흥천사는 조선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기틀을 잡아가면서 유생들의 위협에 거듭 노출된 흥천사는 연산군대에 화재로 사리각만 남고 모두 불탔다가 그 마저 중종 대에 전소돼 사라졌다. 그러나 흥천사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조선 개국과 함께 시작한 흥천사는 왕조의 흥망을 함께 하며 끝까지 곁을 지켰다. 그 공덕 덕분일 까 흥천사는 오늘날 더 크게 번창했다. 역사에 묻혔던 신덕왕후와 흥천사는 왕조의 기운이 쇠하면서 다시 부상한다. 왕후 복귀 논의가 일어나던 1569년(선조 2년) 왕명으로 신흥사(新興寺)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정릉 주변에 들어선다.

신덕왕후가 복위한 뒤 흥천사는 정조 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다. 헌종이 칠성각을 짓고 산내 암자 적조암을 창건했다. 철종은 극락보전 명부전을 낙성했다. 고종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 대방과 요사를 짓고 원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은 뒤 사액 현판을 내렸다. 흥선대원군 사후(死後)에도 고종은 42수(手) 관음상을 봉안하여 왕조의 부흥을 기원했다.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이 곳에서 몸을 쉬었으니 흥천사는 조선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락을 함께 했다. 
 

서울 최초의 한옥건물로 유명한 어린이집.
서울 최초의 한옥건물로 유명한 어린이집.
관음상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
관음상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

이웃 위하고 함께하는 흥천사

왕비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던 흥천사는 이제는 국민을 하늘처럼 받든다. 수 십년간 묵었던 난제를 단숨에 해결한 비결은 주민과 소통을 통한 신뢰였다. 주지를 맡은 금곡스님은 사찰 보다 이웃을 먼저 챙겼다.

지역민들을 초청해 해마다 2~5차례 경로잔치를 베풀고, 연 4천만원에 이르는 불우이웃돕기 성금, 2000만원의 장학금에다 경로당을 후원했으며 24시간 통행로를 개방해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서울 최초로 한옥 어린이집을 지어 최상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했다. 지역 주민을 보듬고 챙기자 관도 응하고 주민들도 화답했다. 하늘인 국민들 마음을 얻자 사찰이 크게 변모한 것이다. 

범상치 않은 주지스님의 행화(行化)는 깊은 수행과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낙산사 복원 등 많은 경험 덕분이리라. 그렇다 해도 수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사람들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수모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대방 주련 글귀가 스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해 가슴 깊이 다가왔다. 

‘능수고방위지사(能受苦方爲志士), 긍흘휴불시치인(肯吃虧不是痴人), 자소이성신외신(自笑已成身外身)’ “고통을 달게 받아야 지사라고 할 수 있으니, 손해와 수모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 웃을 수 있으면 이미 몸 밖으로 몸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네.”
 

대방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옛 사진 속의 흥천사.
대방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옛 사진 속의 흥천사.

[불교신문3583호/2020년5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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