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41> 금성에 봄이 오니 꽃이 만개하네 - 자비 마립간②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41> 금성에 봄이 오니 꽃이 만개하네 - 자비 마립간②
  • 조민기
  • 승인 2020.02.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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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 있다 했던가”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66년 고구려 국내성

대전에 모인 신하들은 장수왕의 구겨진 미간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연 장수왕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신하들을 향해 물었다.

“위나라의 안락왕과 상서가 예물을 가지고 곧 국경에 도착한다고 하오. 다들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 보시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대상이 먼저 의견을 말했다.

“위나라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사옵니다. 주변국을 모두 제압하고 화북을 평정했으며 민심을 안정시키니 위나라의 백성과 군사들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럼 대상께서는 이 혼사에 찬성한다는 말씀입니까?”

“강성한 나라에서 먼저 지극한 예를 다하여 혼인을 청해온 것은 고구려와 척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거절할 명분이 없습니다. 지금 고구려의 남쪽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신국은 고구려에 복종하는 척하며 뒤로 백잔과 손을 잡고 있습니다. 백잔과 신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나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북방이 안정되고, 위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좋은 일입니다.”

대대로의 말에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고구려의 원수였던 백제가 신국과 손을 잡은 것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눌지가 뜻밖에도 백제의 화친 제의를 수락했을 뿐 아니라 실직성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군사가 신국 일개 성주의 손에 죽고 말았으니 괘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백잔이야 원래 믿을 수 없는 족속이었으나 신국이 저들과 손을 잡은 이상 신국도 고구려의 원수입니다. 발밑에 적을 두고 머리 위의 적과 싸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손이 자유롭고 튼튼해야 발을 간지럽히는 벌레를 잡기도 수월할 것입니다.”

대전의 분위기를 살펴보던 대상이 대대로의 말에 찬성하며 의견을 덧붙이자 장수왕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다른 신하의 의견을 물었다.

“우태의 생각은 어떠한가?”

“위나라는 연나라에도 지극한 예를 갖춰 통혼한 적이 있습니다. 날로 강성해지는 위나라를 경계하던 연나라는, 옳다구나 싶어 얼른 혼인을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연나라로 시집간 위나라의 공주는 첩자 노릇을 훌륭하게 해냈고, 위나라는 연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고구려와 위나라, 두 나라가 혼인으로 동맹을 맺게 되면 과연 고구려가 얻는 것이 더 많겠습니까? 위나라가 얻을 것이 더 크겠습니까? 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장차 우리 고구려를 넘보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우태’라 불린 남자는 얼굴이 하얀 것이 서생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으나 대전의 강건한 사내들을 일시에 조용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진 힘이란 ‘정보’와 ‘지식’이었다. 

“그럼 그대 생각에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미 위나라의 사신이 국경으로 오고 있다.”

“사신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미 도착했다면 대왕께서는 일부러 앓아눕는 시늉을 해서라도 사신을 만나지 않아야 합니다.”

“일부러 앓아눕는 시늉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옥체가 상하여 사신을 만나지 못한 것은 작은 일이지만, 일부러 예물을 받지 않은 것은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태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다들 무릎을 쳤다. 위나라에서 몇 번의 사신이 더 방문했으나 고구려는 끝내 혼인에 응하지 않았다. 장수왕의 결단에 백성들은 탄식하면서도 기뻐했다. 한껏 자존심이 올라간 느낌이었다. 


“스님은 정말 부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사람이오

아무때나 왕궁에 출입하여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시오”

바둑을 함께 두며 
개로왕 진심을 알게 된 도림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개로왕을 속이지 못하면 
고구려와 고구려 백성들이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 

 

472년, 백제 위례성

“스님 차례입니다.”

개로왕은 동그랗게 빚은 백돌을 바둑판 위에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도림이 가져온 바둑돌은 적당한 무게감이 있어 손에 잡히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바둑판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돌을 내려놓을 때면 쾌감마저 들 정도였다.

“이번 판은 소승이 졌습니다. 실력이 날로 좋아지시니 이제 소승은 대왕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연거푸 다섯 집을 내어준 도림이 합장을 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그리 과하게 하시오? 제게 바둑의 재미를 가르쳐주신 분이 스님이오. 바둑은 칼과 창을 들지 않고 하는 전쟁이다, 스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고 했던가, 전략을 세우고 상대방이 속기를 기다리며 집을 잃어 주다가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략도 스님이 알려주셨소.” 

“미천한 재주를 받아주시니 소승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소승은 바둑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알려드렸을 뿐인데 대왕의 실력이 워낙 빼어나신 것입니다. 이번 판만 해도 소승은 당연히 한집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 장담했는데, 대왕께서 이곳에 이렇게 절묘한 수를 두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스님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오. 진작 스님을 만났더라면 즐거움이 몇 배는 더했을 것인데 말이오.”

“이 넓은 대궐 안에 대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바둑 하나란 말씀이옵니까?”

“스님, 나는 비록 왕위에 올랐으며 10년을 없는 사람처럼 살았소. 신국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백제를 지키고자 했던 선왕(비유왕)이 비명에 가신 후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소. 선왕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고구려가 공격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했지. 선왕의 시신은 아직도 들판에 계시건만 아직 수습조차 하지 못하고 있소.”

개로왕의 울분에 찬 표정을 보며 도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쓰러운 사내였다.

“그뿐이 아니오. 왜국의 왕은 우리가 보낸 미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정을 통한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나무에 묶어 태워 죽였소. 이 무슨 야만적인 행위란 말이오. 백제의 미인이 꼭 왜왕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느냔 말이오. 두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이 죽었소. 그러고도 왜왕은 다시 미인을 요구했소. 우리에게 왜국의 군사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잘못을 하고도 그리 당당한 것이었소. 허나 나는 우리 백제의 백성을 호랑이 아가리 같은 왜왕에게 보낼 수가 없었소. 대신에 왕비를 왜국에 보냈소.”

도림은 개로왕의 충격적인 고백에 잠시 말을 잃었다. 

“어차피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인질이었으니까. 다시 미인을 보냈다면 요구가 더 많아졌겠지. 하지만 왕비가 인질로 간다면 그들도 함부로 못 할 테니까. 아시오? 당시 왕비의 뱃속에는 나의 아이가 있었소.”

“인질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왕비님을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왜군의 도움을 절실한데 아무도 인질로 가겠다는 이가 없어서 왕비를 보낼 수밖에 없었소. 동생 곤지가 함께 갔소. 왜국으로 보내기 전, 나는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었소. 그래야 왜국에 가서 혼인에 이용당하지 않을 테니까.”

개로왕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도림은 왜 개로왕을 공략할 때 미인이 아무 소용이 없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개로왕에게 바둑은 그를 괴롭히는 과거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왕비가 품고 있던 아들, 우리 태자는 왜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외딴 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 들었지. 아버지인 나는 아들이 태어날 때 왕비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아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소. 왕비를 닮았다면 아주 잘 생겼을 텐데…. 죽기 전에 왕비와 동생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소.”

개로왕은 바둑판을 보며 울음 같은 한숨을 뱉었다. 도림은 개로왕의 마음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그에게 말했다.

“소승이 전해 듣기로는 최근에 위나라에서 고구려에 황제의 후궁으로 삼을 공주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개로왕의 눈이 커졌다.

“저 강성한 위나라에서 고구려에 국혼을 청했단 말이오? 하아”

개로왕의 탄식에 도림은 은밀하게 속삭였다.

“헌데, 고구려에서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위나라는 지금 고구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위나라에서 고구려에 혼인을 청한 것은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인데 고구려가 대놓고 이를 거절했으니, 화북을 통일한 위나라로서는 위험을 곁에 두느니 없애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위나라에 도움을 청해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위나라에 도움을? 그게 무슨 말이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지켜보다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만약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백제도 돕겠다,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위나라의 손을 빌려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승산이 훨씬 크지 않겠습니까?”

개로왕은 도림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계책이었다. 개로왕은 도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님은 정말 부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사람이오. 앞으로는 아무 때나 왕궁에 출입하여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 하시오.”

개로왕의 진심을 알게 된 도림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개로왕을 속이지 못한다면 고구려와 고구려의 백성들이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그를 믿어준 장수왕을 위해서라도 백제를 무너뜨리는 과업은 완수해야 했다. 개로왕의 마음을 얻었으니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불교신문3554호/2020년2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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