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이 만난 사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불교신문이 만난 사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 파주=이성진 기자 사진=신재호 기자
  • 승인 2019.03.2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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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비 벗고 현실에 뛰어들어야 살아남는다 ”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학자 이이화 씨를 만나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여든 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인터뷰 내내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소년은 10살이 되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둔산 암자로 들어갔다. 주역의 대가였던 아버지는 소년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이곳에서 한문공부를 시켰다. 의상대사가 진리의 세계를 압축해 표현한 ‘법성게’도 함께 배웠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 웬만한 성인보다 한문을 능숙하게 사용했고, 법성게도 줄줄 외울 만큼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불교가 뭔지 잘 몰랐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저녁만 되면 ‘차분히 앉아 관(觀)하라’는 말을 항상 했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관’하려 했지만 소년의 머릿속엔 잡생각만 가득 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게 참선이었고 소년과 불교의 첫 인연이다.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유년시절 이야기다. 다양한 저술활동과 강연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선 이 씨를 지난 8일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그의 서재에서 만났다.

고된 생활고에 학위 없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이겨내…
사회가 인정하는 역사학자

유년시절 참선하며 자연스레
이어진 불교와의 인연 ‘지속’
‘사회와 함께하는 불교’ 제언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대둔산 암자에서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배운 그는 더 큰 세상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서양 문물을 가르치는 신식학교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또래들이 중학교 다니는 모습에 비해 자신을 초래하게 느낀 이 씨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일념으로 15살이 되던 해 아버지 몰래 가출했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은 없었다. 부산과 여수 광주 등지의 고아원을 전전했다.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학구열마저 꺾을 수 없었다. 어렵게 구한 입시용 책을 달달 외워 당시 지역 명문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은 ‘문학소년’이였지. 내가 학예부장도 했었다니깐. 도서관에 가서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카뮈의 작품을 많이 읽었어. 대학도 작가를 꿈꾸며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로 진학했어.” 그러나 생활고가 그의 인생을 붙잡았다. 때마침 들린 모친의 위암 투병사실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당시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술집 웨이터에 치약장사, 외판원 등을 하며 돈 벌 수 있는 일은 다했지. 밤에는 명동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군밤을 팔았어.” 그러던 중 두 번째 불교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알고 지내던 공초 오상순 시인을 명동에서 만났는데, 그 때 같이 있던 최종화라는 사람이 <불교시보>라는 신문을 창간한다고 기자직을 제의한 것이다. 좋은 기회라고 느낀 이 씨는 3년 간 기자생활을 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사찰을 정말 많이 다녔어. 탄허스님, 청담스님, 석주스님 등 당대 큰 스님들을 많이 만나 법문을 들으며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이었어.” 이 씨는 당시 만난 스님들 중에서 광덕스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소탈하고 겸손한 마음씨가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고 했다.

“스님으로서 지켜야 할 지켜야 할 덕목은 다 갖춘 분이었어. 아직도 스님이 대각사 주지 시절 3년간 광화문에서 남대문 명동입구까지 새벽 거리 정근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 항상 대중들을 위해 항상 몸 받치던 스님이었지. 아직도 기억나.”

이 씨의 공식 학력은 고졸이다. 대학 졸업장은 물론 박사 학위도 없다. 그래서 몇몇 이들은 그를 ‘야인(野人)’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을 그를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오로지 실력으로 이겨냈다. 특히 대중성을 바탕으로 1995년 발간된 <한국사 이야기>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세상은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한학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많은 저술활동과 강연을 펼쳤다.

일반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재미있고 친근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대중들의 호응이 뜨거워졌다. 좋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들도 먼저 그에게 와서 배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가난하고 학위가 없어도 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딴 길로 새지 않고 내 길만 오로지 팠어. 그 길을 쭉 걷다보니 이제 사회에서도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환경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어도 꾸준히 노력한 대가인 것 같아.”

물론 여전히 정규 과정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미련은 가슴속에 남아있지만, 이 씨는 어렸을 적 체득한 불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석좌교수도 지내고 명예박사도 받았다.

그는 여든 셋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인터뷰 내내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최근엔 바둑에 푹 빠져있는 그지만 여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글을 쓰는 시간이다. 며칠 전엔 새로운 신간을 발표해 눈길을 끌고 있다.

불교계 고승이라 일컫는 인물을 포함해 그간 잘 조명되지 않았던 방외의 인물 등 총 17명의 스님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이이화의 명승열전>이다. 지금까지 불교사에서 위대한 스님으로 칭송받는 이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한계나 기행 등 잘 알지 못한 부분을 다뤘다.

반면 김시습으로 알려진 설잠스님, 신돈으로 잘 알려진 변조스님 등 잘 다뤄지지 않았을 뿐더러 역사에 대항하며 문제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이들의 이야기도 다뤄 흥미롭다. 아울러 선방을 박치고 시대에 부응에 함께한 백용성스님, 한용운스님 등의 고뇌도 담아냈다. 17명의 스님을 관통하는 일정한 화두는 ‘당대 발현된 투철한 시대정신과 중생제도의 신념’이다. 진짜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고 싶다는 이 씨의 바람이 담겨있다.

지금도 많은 사찰에서 강연을 통해 불자들과 만나며 불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게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을 구했다. 역사를 친근하게 소개했던 그답게 불교도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콘텐츠 개발, 대사회적 운동을 주문했다.

“불교의 위기라는 것은 1960년대에도 나오던 이야기였어. 이제 불교를 대중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해. 최근에 출시되고 있긴 하지만, 방대한 불교의 내용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 같아. 또한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소외된 이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게 부처님 가르침이지. 이웃종교에 비해 인권, 복지 사업이 미약하잖아.”

이 씨는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실과 동 떨어진 접근으로는 불교가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신화적인 부분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출가를 한 스님 이야기나 입적 후 나온 사리 개수로 스님들의 서열을 나눈다던지 신비스러운 건 이제 현실과 어울리지 않아. 어려워 보이니깐 사람들이 절을 안 가고 안 찾는 거야. 실제 중생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고 친근하게 다가가야 사람들이 절에도 찾아가고 부처님 가르침도 배우지. 그게 불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온 사학자이다. 1937년 대구에서 유학자인 야산 이달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근무하며 한국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어 역사문제연구소장, <역사비평>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서원대 석좌교수를 지냈고,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인물 탐구에 주력했으며,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우리 역사를 재밌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저서로는 <한국사이야기>, <인물로 읽는 한국사>,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허균의 생각>,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등 100여 권이 넘는다.

[불교신문3473호/2019년3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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