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불기 2563 (2019).3.26 화

사이드바 열기
상단여백
HOME 수행&신행 수행&법문 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해인사 무관스님“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지만 봉사기회는 많지 않다”
  • 해인사=김선두 신재호 기자
  • 승인 2019.03.06 09:18
  • 댓글 0
대종사 무관스님이 들려주는 가르침은 멀리 있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일 뿐”이라는 경구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말씀과 기도에는 온 정성을 다하라는 당부였다. 신재호 기자

 

제대 후 환속 많던 시절

“중노릇 잘하게 해 달라”

대예참 백일기도 후 입대

 

“정성껏 기도하면 꼭 성취

그렇게 50년째 이어와 …”

 

해인강원, 종단 행자교육원

계단위 법계위 등서 봉사

묵묵히 소임 다해온 율사

 

가정형편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열네 살 소년에게 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유일의 길이자 희망이었다. 집안 어른이 여순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는 6ㆍ25한국전쟁 때 입대해 ‘행방불명’ 상태였다. 하지만 선연(善緣)이 있었던 것일까. 해가 저물면 스님들이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곤 했던 터라 <반야심경> 정도는 욀 정도가 되고 때로는 할머니에게 가르쳐 드리기도 했다. ‘절에 가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갔다. 학교공부와 연계된 줄 알았다. 영어사전 하나 들고 왔는데 새벽 목탁, 도량석, 예불소리가 그렇게 맑고 좋을 수가 없었다. 사흘 지나 ‘절에서 살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시집가는 건 줄 알았지, 난 ‘출가’ 뜻도 모르고, 절 집 용어도 모르고 왔는데…”

그렇게 절에 발을 들여놓은 소년이 바로 올해 일흔다섯의 ‘청년율사’ 해인총림 해인사 한주 무관스님이다. “이 생에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도제양성에 온 힘을 기울여 온 우리 시대의 강사이자 대표적 율사로 종단의 계단위원, 법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4년 행자교육 관여하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를 받았다. 입춘을 열흘 앞둔 1월24일 스님은 기자를 해인율원으로 안내했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 미안합니다.” 스님은 합장 반배로 반갑게 맞아주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엄숙함을 주는 주련(柱聯)이었다.

 

自從今身至佛身 堅持禁戒不毁犯

唯願諸佛作證明 寧捨身命終不退

我昔所造罪惡業 皆由無始貪瞋痴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지금 이 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굳게 계율을 지켜 추호도 범하지 아니하리니/ 바라옵건대 모든 부처님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소서./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물러나지 아니하겠습니다./ 제가 지난날 지은 모든 죄업은/ 하나같이 한량없는 탐진치로 생겨났으니/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죄/ 지금 모두 참회합니다.”(律藏立志偈)

손으로 직접 가리키지도 않았지만 왠지 스님의 마음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암-현로-희섭스님. 선(禪) 중심의 가풍이 엄연한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해 은사(희섭) 스님이 주지를 맡아 따라 나선 화성 용주사엔 운허스님, 탄허스님 같은 당대 최고 강백들이 ‘역경원’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산 향천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군 입대 전 이곳에서 원주소임을 보며 <서장>에서 <능엄경>까지 보는 복을 누렸다.

스님의 면모와 책임감은 이 때부터 읽을 수 있었다. 군에 갔다 오면 환속하는 경우도 많던 때라 은사 스님이 징병통지서를 치워버려 1년이나 늦어졌지만 무관스님은 병역 의무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원(願)을 세운 것이 ‘군대 갔다 와서도 중노릇 잘하게 해 달라’는 것이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한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해 중노릇 한 게 어언 60년 됐죠. 그래서 신도들한테 ‘기도하면 꼭 성취된다’고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기도는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목표가 분명히 있어야 하거든요. 그걸 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이라 하죠. 원을 분명하게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면 정성껏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에서는 새벽예불 끝에, 마지 올리기 전후, 오후2시경, 저녁예불 마치고 한두 시간씩 사분정근이니 하루 8시간은 하는 거죠.”

지금은 칠정례로 부처님께 주로 예를 올린다지만 스님은 <석문의범> ‘대예참’의 첫머리를 외워보이며 자신만의 기도법을 소개했다. 29번 절을 해야 하는 결코 짧지 않은 기도를 입대할 당시 100일 간 하다 보니 저절로 외워진 것이다. 입대를 앞두고 100일 기도를 두 차례나 한 것이다. 제불통청 때 보통 불법승 삼보를 한 번에 청하지만 스님은 불보 법보 승보를 따로 청할 정도로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린다. 지금도 혼자 할 때는 행자 때 하던 그대로 이어간다. 대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스님의 근기를 알아본 것일까, 인연의 지중함이 작용한 것일까. 제대 후 합천 해인강원(승가대학)에 방부를 들인 스님은 여기서 또 한 분의 스승을 만나 48년째 해인총림에 살고 있다. 자기 먹을 식량은 자기가 내고 살아야 하는 ‘자비량’이 이어지던 시절이다. 강원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1973년 ‘중강’을 맡으라는 주지 지관스님의 권유가 있었다. 지관스님한테 배우며 강원을 졸업하고 1년6개월가량 먹은 ‘밥’이 빚이라는 생각에 종무소 서기소임이라도 보며 빚을 갚으려 했는데 ‘중강’ 소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빚 갚는다 생각하고 중강으로 3년여 <치문> <사집> 등을 가르치다 보니 훈고학(訓詁學)식이라 항상 뭔가 미흡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스님들에겐 석 줄씩 가르치는 데, “저 자신도 시원찮고 깨닫지도 못해 현대교육은 어떤가?”해서 대학 갈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 의욕은 스님의 건강을 해치는 한편 말문(설법)이 트이게 하는 계기도 됐다.

중학교 졸업하고 입산한 스님에게 절에서 학교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말 그대로 역경의 시작이었다. 동화사포교당 대구 보현사 부전 겸 법회를 맡아 일주일에 7~8회 법회를 하며 방송통신고등학교 과정을 마쳐야 했다. 남들 보다 훨씬 많은 기도와 법회, 살림살이로 공부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2년제 대학을 거쳐 4년제 대학 3학년 편입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스님은 배움의 길을 놓지 않았다. 다시 동국대에서 지관스님을 만나면서 수행자로서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게 됐다. 교육대학원에서 <강원교육의 피드백 연구>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공부하러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1983년 지관스님께서 해인사 강사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공부는 일생 하는 것이지만 봉사할 기회는 많지 않다’면서요” 그래서 교육대학원에 적을 둔 스님은 그해 해인사 강사를 시작으로 동국대 경주캠퍼스(15년) 대구 가톨릭대(12년)의 강의까지 이어갔다. 전통강원에서는 일단 외우고 시작하지만, 초발심 과정에서는 한국불교사를, 사교에서는 중국불교사를, 경전과정에서는 인도불교사를 들려주며 강의를 하는 등 나름대로 교수법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생활 속의 수행을 중시하는 스님의 입장에서는 요즘 학인들을 보면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개인 독방 갖지 말고 부처님을 모신 큰방에서 떠나지 말라”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은 어린 날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출가 정신을 바짝 조이게 하는 큰 힘이 되었는데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개인 방 안 주면 학인이 오지도 않는 시대”라 하니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중생활은 일정 부분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승가하면 ‘화합’을 얘기하잖아요. 양보 없이 화합은 될 수 없는 거죠. 하심(下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대중생활 자체가 곧 화합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스님은 모든 것을 대중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육체적 노화에 따른 세월은 스님에게 그것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계단이 많은 산사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새벽예불과 사지마지 시간은 대중들의 호흡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혼자 참선하고 책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아침공양 후 비로전을 찾아 행자 때부터 해오는 기도시간을 한 시간 정도 갖는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니라.” 스님이 제일 좋아하는 경구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느니라.”

이제 팔십 대를 바라보는 세수. 스님은 자신보다는 이타행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할 때 ‘아미타불’ 그럽니다. 그리고 스님들한테는 ‘성불하십시오’, 신도들한테는 ‘행복하십시오’. 그렇게 인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지금 제가 하는 일이죠.” 입산부터 대종사 법계에 이르기까지 60년을 지탱해 온 힘은 지극히 어려운 경전도 아니고 <초발심자경문>, 인연 따라 만난 스승들이 전해준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믿고 꾸준히 실천해온 굳은 신심이었다.

 

 

‘성불하십시오’  ‘행복합시시오’. 입산한지 어언 60년을 맞은 무관스님의 인사법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 무관스님은 …

법호는 태허(太虛), 지난 2018년 5월 종단 최고 ‘대종사’ 법계를 받은 무관(無觀)스님은 194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59년 평창 월정사에서 희섭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4년 예산 향천사에서 보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2년 양산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해인사승가대학(강원)을 졸업하고 1983년 법혜스님과 함께 지관스님의 전강(傳講)제자가 되어 승가교육에 전념해 왔다. 1984년 종단의 행자교육에 몸을 담은 이래 동국대 교육대학원(교육학 석사) 졸업하고, 해인사 승가대학장, 해인사 율원장, 조계종 중앙종회의원(8, 10대), 행자교육원 유나,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 총무원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승가교육 발전 및 계율 정립을 위해 헌신해왔다.

또한 1985년에는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법계사를 창건해 종단 등록을 마치고 지금은 해인총림 해인사 한주로 주석하며 조계종 의제실무위원장, 계단위원회 위원, 법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자운-지관스님의 계맥을 전해받기도 했으며 앞서 1990년 불교방송 개국이후 1년에 걸쳐 강의한 <불교이해>를 단행본으로 엮어내기도 했으나 절판돼 전하지 않는다.

[불교신문3469호/2019년3월9일자]

해인사=김선두 신재호 기자  sdkim25@ibulgyo.com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해인사=김선두 신재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뉴스
여백
여백
여백
여백
icon
"SNS에서도 불교신문
뉴스를 받아보세요"

kakaostory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