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불련 30주년을 돌아보며<上> 창립 배경

1983년 가을부터 국내외서

전두환 5공화국 체제 압박

학생조직 선두로 노동 농민

청년 등 운동역량 훌쩍 커져

 

정국은 늘 대치국면에 …

 

상대적으로 약했던 불교계

1983년 비상종단상황 겪고

대불련 통해 배양된 운동력

질적 변화 시점에 이르러

지난 5월1일 서울 흑석동 달마사에서 가진 민불련 30주년 식수 기념사진. 왼쪽부터 호산스님, 장기표, 혜문스님, 성문스님, 서동석(필자), 이종률, 박준호.

3년 전 여름 더위가 찾아들던 무렵 난데없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무심하게 받아든 전화기를 통해 이영근이 다급한 목소리로 “멱정(覓丁, 여익구 민불련 초대의장 법명)형이 교통사고로 숨졌다”고 알려왔다. 믿을 수 없어 다시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마찬가지였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형수(공화춘 여사)한테 전화로 들은 얘기”라며 현재 시신이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어 자신도 거기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나도 부리나케 그곳으로 갔다. ‘멱정’ 하고 보낸 생전의 인연은 거기서 그쳤다. 1984년 여름에 형을 만났으니 30년의 세월이었다.

<한겨레> 신문에서 멱정에게 바치는 조사(弔詞)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민주사회장’으로 멱정을 보내기로 하여 엄청 부산한 가운데 빈소 한 구석에서 조사를 썼다. 불쑥 서른 해 전에 만났던 순간이 ‘운명’이었나 싶었다.

“…전생의 인연이란 게 있긴 있나 봅니다. 그 잠깐의 만남이 운명처럼 서로에게 작용하였으니 말이요. 우스개처럼 나는 형 때문에 전과가 더 붙었다고 하면 형은 사래를 치면서 나 때문에 삶이 팍팍하다고 하였지요. 아무려나 살을 에는 겨울이나 다름없던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중불교운동연합이라는 조직을 꾸려내고 ‘투쟁’으로 이 사바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자고 대들었으니 순전히 형의 깡다구에 내가 말려들은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라고 푸념을 털어 놓았다.

돌아보면 1980년대의 만남은 모두 ‘운명’이었다. 1981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절친한 친구가 ‘잘 아는 스님이 있는데 만나보지 않을래?’하여 찾아간 곳은 ‘강남포교원’이었다. 1984년, 내게 ‘현묵(賢默)이라는 법명을 주신 성열스님이 그 분이었다. 아직 법원단지가 들어서기 전, 화훼시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던 서초동의 한 상가건물에 있던 강남포교원은 1983년 봄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들이닥쳐 쑥대밭이 됐다.

그 해 5월 말, 정말이지 미치도록 화사한 봄날, 포교원 작은 방에서 밤새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었다. 철필로 기름종이에 글을 긁고 그 기름종이를 둥근 막대에 묻힌 잉크로 글씨를 드러나게 하는 등사기도 귀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그때 반정부 인쇄물의 대게가 교회에서 만들어졌다. 교회는 주보를 내느라 등사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강남포교원 원장 성열스님은 교리강좌 교재를 직접 등사기로 만들어 배포했다. 주보도 등사기로 만들어 발행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무렵 사찰에서 반정부 인쇄물을 만들기는 내가 처음이었고, 강남포교원 등사기는 한국불교사에서 최초로 반정부 유인물 제작 증거품이 되지 않았을까. 기억하건대 유인물은 ‘광주학살원흉 전두환’의 만행을 폭로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밤새 만들어 다음 날, 건국대학교 학내시위 때 배포했다. 성열스님을 소개했던 친구와 함께 시위를 조직했다. 친구와 나는 구속됐고, 시위에 참여했던 후배들 가운데 8명은 강제징집됐다. 강남포교원은 반정부시위를 지원한 사찰이 되어 뜻하지 않은 수난을 당했다.

1985년 5월5일자 동아일보 ‘민불련 창립모임’ 보도 기사.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스님 20여명과 신도 120여명이 연행됐다.

친구 정광채는 징역2년형을 받아 감옥에 있다가 1984년 2월8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는 1985년 가을 온양 오봉암으로 입산하였다가 금정산 범어사에서 계를 받아 부산 선암사, 성남 봉국사 등을 거쳐 지금은 대구 팔공산 들머리에 있는 지장선원 주지로 있다. 출소하고 스님을 뵈니 내가 구속되던 무렵, 나 때문에 당한 일들을 전하면서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냐”고 웃으면서 말씀하였다. 하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느닷없이 시커먼 놈들이 포교원에 처 들어와서는 웬 증거물을 찾는다고 난리북새통을 벌이고 눈은 벌개갖고 불법시위 배후 운운하며 닦달을 하니 얼마나 놀랬을지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스님에게 “차라리 모르고 당하신 게 나았을 겁니다” 하고 에둘러 사과를 했다. 난리 겪은 지 근 1년의 시간이 흐른 뒤라 곤욕을 치룬 일도 어느덧 지난 일이 되어 추억의 새살이 아픈 상처를 가리고 있어 이처럼 여유롭게 말 할 수 있었다. 스님도 웃어 넘겼다.

감옥에 있을 때 성열스님이 <현대사회와 불교>(한길사 1981), <현대한국불교론>(도서출판 여래 1983) 등을 보내 줬다. 두 권 다 여러 사람이 쓴 공저(共著)였다. 그 필자 가운데 멱정이 쓴 글이 유독 끌렸다. 감옥에서 나가면 만나봐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결국 1984년 여름, 성열스님이 고리가 되어 멱정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민중불교운동연합, 약칭 민불련(民佛聯)으로 더 익숙한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세상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이를 사회과학적 용어로 대체하자면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상놈 위에 기생하는 양반의 세상’이 영원할 것 같지만 때에 이르면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다. 그 체제가 갖고 있는 ‘모순’의 강도가 점차 심해져 마치 끓는 물처럼 ‘한계’에 이르면 그 체제는 종국을 맞는다. 봉건체제가 그렇게 무너졌고, 항상 할 것 같은 자본주의체제도 그러할 것이다. 봉건체제가 무너질 때 마침 시민혁명도 일어나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는데 한층 발걸음을 빠르게 만든다.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을 때, 그 혁명과업을 수행할 인간의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때’에 걸맞게 결국에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때를 받쳐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 체제뿐이랴. 한 단체가 만들어지는 조건도 안팎이 잘 맞아야 한다.

1980년대 중반, 민불련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정세는 상당히 무르익었다. 전두환의 5공화국 체제는 1983년 가을부터 국내외의 압박을 받았다.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남한의 민주화를 탄압하고 분단의 고착화를 고수하려는 반민중 반민주 반민족 정권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됐다. 여기에 학생조직을 선두로 노동, 농민, 청년, 빈민 등 각 부문에서 운동역량이 훌쩍 커져 정국은 늘 대치국면에 있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던 불교계의 운동역량도 1983년의 비상종단상황을 겪고 또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를 통해 배양된 운동력이 더해져 운동의 질적 변화 시점에 이르렀다. 진보적 불교운동을 이끌어 갈 공개조직은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것이다.

불교학습모임 … ‘사원화 운동’

민불련 이전 불교계 활동가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대해서는 이희선(도서출판 미들하우스 대표)이 2007년에,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우리 불교계 운동사를 정리하면서 증언한 부분이 있어 여기 인용한다.

“이희선, 노일현, 김지형은 지역 사찰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연계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모색하며, 이희선은 후에 이를 ‘사원화 운동’이라고 이름 붙인다. 1979년 가을 이희선은 출옥한 안동일과 만나 그와 조계사 불교학생회 고등학생회 동기인 조성열과 함께 불교학습모임을 하기로 한다. 이희선, 안동일, 조성열, 신상진, 김정우 등이 법련사에서 학습을 하며 사찰 대학생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1979년 11월 만기 전역한 최연은 1980년 1월 대불련 총회에서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출됐으나 곧 사퇴해, 대불련은 다시 새로운 전기를 기다리게 된다. 1980년 봄, 노일현은 동국대 학생회 부활위 총무를 맡으면서 학교일에 전념하게 되고, 김지형은 대불련 부회장을 맡게 된다. 이희선은 그 해 봄의 동국대 민주화 운동을 ‘민주화 대약진 운동’으로 이름 붙이며, 학내 시위를 주도한다. 1980년 광주민주대항쟁 이후, 법련사 모임은 추진을 가속하여 1980년 10월 초, 마침내 삼청동 칠보사에서 ‘칠보사 대학생회’(초대 회장 이희선)를 창립한다.

1980년 10월 24일, 노일현, 김지형, 이희선은 문무대 입소식을 하고 있는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광주민중항쟁을 계승하여 전두환 신군부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쟁취하자는 취지의 시위를 하고 구속되는데, 불과 사흘 뒤에 10·27 법난이 일어난 것을 유치장에서 알고, 장탄식을 한다. 이후, 1982년 7월 말에 함께 출소한다. 김지형은 준비 기간을 거쳐 노동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다, 1985년 부천 지역에서 원혜스님과 함께 노동자를 위한 포교당을 운영한다.

노일현은 1983년 대불련(회장 김영국) 간사장이 되어 활동하면서, 경국사 청년회(초대 회장 김유진)를 창립한다. 또한 김태수와 함께 도서출판 여래(발행인 성문스님, 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를 창립하여 <현대한국불교론> <현대불교의 사회인식> 등을 출판했다. 활발한 활동을 하던 노일현은 1983년 1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게 된다.”

다음 회에 증언은 이어진다. 참고로 이희선은 내가 멱정을 처음 만나던 무렵 불교사회문화연구소(佛社硏, 당시 소장은 한상범 동국대 법학교수로 1990년 불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하여 월주스님과 함께 공동대표를 한 뒤 김대중 정권에서 장관급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냄) 간사였다.

[불교신문3112호/2015년6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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