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불련 30주년을 돌아보며<下> 민불련 운동의 성과와 과제

 

가장 잔인했던 세월 6년 활동

모든 것 걸었던 안희대 박만호…

이들을 잊지 않으려 음력 10월

흑석동 달마사서 천도재 봉행

 

그런 시절 민불련 동지들 만나

치열한 투쟁을 할 수 있었으니

그것도 정말 ‘복’이라 여긴다…

비록 6년에 그쳤지만 가장 잔인했던 세월을 함께 했던 터라 60년이 지나도 잊혀질 수 없는 동지들이 적지 않다. 10년 전인 2005년 5월 민불련 창립 20년 기념해 세 명의 의장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2기 고광진, 1기 여익구, 3기 서동석 의장(필자).

 

이희선의 증언(본지 3111호 11면) 은 이어진다.

“1983년 성문스님(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여익구(민중불교운동연합 1기 의장)를 도와 비상종단 수립에 이르기까지 실무 활동을 했던 이희선은 그 해 겨울 비상종단 하에 있었던 불교사회문화연구소를 홀로 맡게 되는데, 1984년 1월 집시법으로 구속되었다 출소한 박정순과 공계진이 합류한다. 1984년 동국대 석림회의 법안, 장적, 현능, 재범스님이 주축이 되어 학습 모임을 갖게 되는데, 이는 이후 석림회가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1984년 봄 무렵부터 여익구, 홍사성, 최연, 이희선 등은 모임을 갖고 불교개혁운동에 관한 토론을 하는데, 1984년 8월 비상종단 해체 직후인 10월 여익구는 불교사회문화연구원을 세우고 ‘불교와 사회’라는 회보를 발행한다. 1984년의 불교운동은 최연이 사무총장으로 있는 대불련과 칠보사 대학생회, 경국사 청년회, 동국대 석림회, 중앙승가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등에서 이루어진다.

1985년 1월 속리산 법주사에서 대불련 연수회(회장 노태훈) 및 총회를 맞아 여익구, 최연, 이희선은 불교계에도 이제 공개운동 기구가 필요하며, 역량이 갖춰져 있음에 동의하고 이를 준비하기로 한다. 이후, 여익구는 ‘민중불교운동연합’으로 명칭을 정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여기까지가 2007년에 이희선(도서출판 미들하우스 대표)이 정리한 민불련 이전의 상황이다.

이런 판에 마침 그 무렵에 ‘운동의 조직화’에 한층 힘을 보태 주는 계기가 있었다. 당시 서독(독일로 통일되기 전)의 언론인이 세운 재단의 후원으로 서울 구로동에 포교원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재단은 제3세계 빈민, 아동, 여성운동을 돕는 재단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인간의 대지’라는 이름을 단 재단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왕자>의 저자로 유명한 생텍쥐베리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재단이다. 설명하자면 상당히 길어지는 인물, 서울대 법대출신의 최 아무개 씨가 주선하여 한국불교의 빈민운동에 쓰도록 하는 조건으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을 지원받았다. 1984년 11월이던가, 이 기금으로 서울 구로3동에 상가 한 개 층을 얻어 자비포교원을 개원했다. 대표적인 빈민촌으로 꼽히던 곳에 운동의 전진기지를 마련한 셈이다.

개원 초기에는 멱정(여익구)이 원장 소임을 맡았으나 다음 해 여름부터는 민불련 창립과 함께 여성부장을 맡았던 혜문스님이 원장을 이어 받았다. 그때 구로지역에는 불교계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가 있던 활동가가 여럿 있었는데, 자비포교원은 그들과 함께 지역운동, 불교운동을 논의하고 실천하는 공간이 됐다. 자비포교원은 1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민불련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나저나 그때 그 재단이 우리를 지원하게 되는 이면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4년 전에야 알게 됐다. 그 무렵 서독 유학 중이던 정윤선이다. 그렇다. 얼마 전까지 참여불교재가연대 사무총장을 하던 분이다. 세상 일이 이렇게 얽혀 있었다.

포교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직건설도 보다 구체화되고 활동가도 속속 결합했다. 조계사 내 정화기념관에 있던 불사연도 인사동 네거리에서 탑골공원 쪽 5층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옮겼다. 1층에 ‘뜨락’이라는 경양식집이 있는 건물이었다. 이 지역에는 1984년 조직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이 있었는데 민불련 창립되기 전 중구 삼각동으로 옮겼다. 또 불사연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에 박정희정부 시절부터 야당정치인으로 활동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는 인사의 조직인 정치범동지회(회장 예춘호)가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종로경찰서의 요시찰 지역이었다. 당연히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한 사찰도 종로서 정보과의 주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상황인지라 내부적으로 보안에 주의하며 조직의 부서를 담당할 인물 섭외에 나섰다. 해를 넘겨 1985년 초에는 어느 정도 인선작업을 마무리하며 공개운동 조직은 점점 어깨를 드러내고 등짝을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의 명칭은 ‘민중불교운동연합’으로 굳혀졌다. 당시 각 부문엔 민주, 민중 또는 민족을 집안의 성(姓)처럼 쓰는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었는데, 불교계도 그 영향을 입은 셈이다. 그때는 단체 이름에 민자(民字)가 붙는 관례를 우스개삼아 ‘민자돌림’이라 했다. 요즘에는 시민운동의 영향 탓인지 ‘연대’가 붙거나 ‘실천본부’를 내세우는 데 비하면 그때의 작명은 단순하면서도 더 명료했다.

민불련은 그 조직의 이념적 지향을 단체명에 담아내고 있었다. 추상적인 ‘불교’가 아니라 역사의 알짜이자 생산의 주체인 민중의 불교이며 이들에 의한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는 운동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긴 했지만 일본제국주의 통치에서 민중불교를 개념화한 만해스님 이래 유신정권에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민중불교론’을 실천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민불련이라 하는데 쉽게 합의했다. 한마디로 ‘모든 민족, 모든 인종이 자본의 억압과 수탈에서 해방된 세상’이 곧 정토이고,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1980년, 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5월17일 밤부터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인 전두환 정권은 이런 민불련이 곱게 탄생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30년 전 5월4일, 원래 예정했던 광화문 한글회관이 원천 봉쇄된 상황에서, 뒤풀이 장소로 잡아두었던 교보문고 뒤편 음식점 ‘포석정’에서 간략하게 총회를 치렀다.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이 곤봉으로 음식점 문을 부수고 들어와 참가한 이들에게 무차별로 폭력을 썼다. 그야말로 전쟁터가 된 창립총회였다. 이때 수원에서 활동하던 청년불자 전일곤은 다리가 부러졌고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100명 가량이 강제로 ‘닭장차’에 실려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잡혀갔다. 그렇게 세상에 선보인 단체이니 이후의 팔자도 또한 파란만장하지 않겠는가….

창립 직후부터 반정부투쟁이 이어졌다. 농성과 가두시위, 항의방문과 불매운동 등의 현장에 민불련이 있었다. 민불련 탄생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 마냥 전두환 정권은 더욱 그악스럽게 민중의 생존권을 말살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노동현장에 대한 탄압은 물론 학원안정법을 만든다는 등 싸울 거리를 줄줄이 내놓았다. 마땅히 맞받아쳤다. 1985년 10월8일, 국제독점자본의 배수지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서울총회를 저지하는 가두투쟁(가투)을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벌였다. 어두운 도심에 불꽃이 날라 다닌 ‘전투’였다. 전일곤이 이 사건의 주범으로 구속되었다. 다음해 인천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1986년 ‘5·3인천항쟁’이다. 이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경기도 파주 보광사 인근에서 체력단련과 화염병 사용 연습도 했었다. ‘5·3항쟁’으로 민불련 1기 지도부가 구속, 수배되었다.

이후 조직을 재정비하여 2기 체제를 갖추었다. 2기는 더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마침 전국적으로 ‘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한 전선이 결성됐다. 민불련이 중심이 되어 불교계도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전국적 투쟁조직을 세웠다. 불교계의 투쟁은 이 나라 민주화 실현에 ‘사북’이었다. 이렇게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서 마침내 1987년을 맞는다.

‘가장 숭고한 천도재’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은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에 도화선이 됐다. 이제는 사라진 ‘치안본부’의 남영동분실에서 1987년 1월,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 온 나라 곳곳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3월3일, 박열사의 49재는 절이 아니라 거리에서 봉행하였다. ‘가투’로 진행된 천도재에는 종교의 구분이 없었다. 한국불교사 통틀어 이런 숭고한 천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야말로 민중의 불교가 아닌가.

박열사의 죽음은 이윽고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전두환이 꼬리를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항쟁의 깃발에 얼룩만 남긴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민불련의 2기도 막을 내린다.

약화된 상황에서 1988년 1월부터 재편된 3기 체제에서도 투쟁은 이어졌다. 1980년 ‘5·18’의 공동주범인 노태우 정권과 맞서 한편으로는 내부 조직재건을,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중운동전선 건설에 힘썼다. 민중의 삶을 옥죄는, 또 남북이 갈린 서울올림픽을 반대하는 투쟁에서부터 ‘광주학살 원흉이자 단군 이래 최대의 도적’ 전두환 처벌, 그리하여 백담사까지 원정 가서 그를 체포하려 했으며 ‘제5공화국 비리청문회’를 계기로 ‘10·27법난’의 진상과 책임자처벌을 위한 투쟁 등으로 1988년을 뜨겁게 보냈다. 그 이듬해 초부터 노태우는, ‘종교계 좌익 활동’ 운운하더니 이를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신공안정국’을 조성했다. 민불련은 그 정국의 과녁이 됐다. 전두환이 불교를 과녁 삼아 10·27법난을 벌이듯이 노태우가 그렇게 했다. 3기 집행부는 치안본부 홍제동분실에 격리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적단체’ 구성원이 되어 모두 구속됐다. 재판을 거쳐 짧게는 집행유예에서 징역1년6월, 또는 징역3년형을 받았다. 조직을 재건할 역량이 되지 않아 1991년 5월 민불련은 공식 해체를 밝히고 ‘역사’로 남는다.

6년 동안 활동했던 민불련이지만, 그 기간에는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게 권력을 장악한 파쇼정권 통치기간이었으며 이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기록을 남겼다. 그때, 누구는 분신으로 대항했고, 누구는 투신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다. 숱한 사람이 죽었다. 변사체로 발견된 이들도 적지 않다. 애초 민불련 창립 때 집행위원장을 맡기로 했던 안희대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또 못된 병고로 우리 곁을 떠난 이들도 많다. 춤사위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박만호도 그 한 사람이다.

이들을 잊지 않으려고 서울 흑석동 달마사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신중기도 기간에 천도재를 봉행한다. 얼마 전 민불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절의 양지바른 곳에 기념식수를 하였다. 창립 때 지도위원이었던 성문스님(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장기표 선생 등이 함께 했다. 언제든 이곳을 찾아 예전의 결의와 동지애를 되살리려는 속뜻이다. 그런 바람도 과분한 건가, 최근 달마사에 된바람이 불어 앞날이 어둡다.

어찌 사람살이에 좋은 날만 있으리오 만은 돌아보면 그 궂은 날, 모진 비바람을 가슴으로 맞닥뜨리며 산 결기가 낭만으로 느껴진다. 한편으로 그런 시절 민불련에서 동지들을 만나 치열한 논의와 투쟁을 할 수 있었으니 그것도 정말 ‘복’이라 여긴다.

미련퉁이 같지만, 나는 이제도 바라고 있다. ‘자본의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다. 하여 여전히 여기서 내 노릇이 뭔지 고민하고 나름 실천하려 애쓰고 있다.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처럼 꿋꿋하게 말이다.

[불교신문3113호/2015년6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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