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선정 ‘2016년 2월의 스승’ 운허스님과 봉선사 불천회관

광릉의 봉선사는 조계종의 25교구본사로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월당스님 등의 3‧1독립만세운동의 지역 중심이었고, 태허 김성숙(金星淑)도 중국에 가기 전 봉선사가 그의 활동 근거지였다.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 중, 왜경에 쫓겨 강원도 봉일사에서 불문에 뛰어 든 이시열(耘虛, 1892-1980)도 유점사를 거쳐 1921년부터 1980년 입적까지 주로 머문 곳이 봉선사이다. 8만 대장경 번역 같은 위업을 이룬 스님의 뜻의 ‘큰 법당’이란 한글 현액이 우리에게 친근감을 준다.

남양주 봉선사 청풍루 아래서 바라본 불천회관. 운허스님의 애국독립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이 큰 법당 뒤의 계단에는 스님이 무궁화를 심었는데, “무궁화동산을 가꾸는 사람(槿園耘人)” 이름으로 ‘무궁화 앞에서’라는 시도 전해 나라 사랑의 마음이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바로 큰 법당 앞의 긴 건물인 청풍루(설법전) 서남쪽 외벽의 중앙에 쓰인 한자의 불천회관(佛泉會館)이란 현액은 독립운동과 불교사상의 커다란 의미와 역사를 담고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이 현액은 입적 11년 후인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받은 젊은 시절의 독립군 투사인 이시열(李時說 ,운허 스님)의 굴곡 많은 역사를 상징적으로 말 해 준다.

평북 정주 태생의 이학수는 젊은 시절 만주에서 이시열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운동 중, 동지들과의 한담에서, 한 동지가 “이 동지는 과연 일당 천(千)의 대장 감 이오”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시열은, “천이 아니라 1억은 돼야 상대하지!” 라고 해서, 동지들은 후에 그를 용감한 ‘억불천(億不千)’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최근 당시 독립운동의 동창학교의 교가 가사 모집책임자로 ‘억불천인’이란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단총(檀叢)이란 민족주의적 호(號)외에 또 ‘억불천’이란 투쟁적 호(號)도 추가된 것이다.

운허스님이 직접 심어놓은 무궁화.

그러나 그 후 이시열은 왜경에 쫓기면서 불문에 귀의해 금강산 유점사와 광릉의 봉선사 등지에서 불자로서 수행에 정진하면서도 민족 교육과 대장경 번역의 대위업을 달성했다. 독립운동 시기부터 교육입국의 뜻을 잊은 적이 없었던 스님은 해방이 되자마자 봉선사에 광동동중학교를 설립했다.

해방이 되고 당시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운허스님에게, “이제 독립을 찾아 억불천의 투쟁은 필요가 없는 불자가 됐으니 불천(不千)보다는 같은 발음의 불천(佛泉)이 더 어울리겠다”고 해서 ‘불천’ 역시 스님의 한 호로서 추가된 것이다.

이처럼 갸륵한 스님의 독립정신을 기리며 후세에도 그의 빛나는 뜻을 전하기 위해 봉선사는 ‘청풍루’를 지으면서 서쪽 벽에 이 액을 걸었다. 스님 생전에 머물던 다경실의 영당을 봉선사는 불천회관이라 했다. 불천은 오늘날 봉선사의 출판사 이름이기도 한다. 스님이 설립한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광동학원의 기숙사를 ‘불천학사(佛泉學舍)’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부와 교총이 금년 3월부터 시작되는 “이달의 교육인” 행사에 2016년 2월의 인물로 이시열을 선정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3‧1절을 앞두고 봉선사의 청풍루아래서 불천회관의 액을 바라보면서 운허스님과 애국독립사상의 거룩한 뜻을 다시 회상해본다.

운허스님의 속명은 이학수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동창학교 교가를 짓기도 했다.

[불교신문3094호/2015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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