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의 알맹이는 뇌를 닮았다. 실제로 머리에 좋은 음식이다. 학습능력 강화에 특효인 DHA와 ‘오메가3’가 다량 함유됐다. 두개골처럼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견과류 가운데서도 가장 먹기가 힘든 열매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섭식의 곤란함을 영생과 불멸의 상징으로 여겼다.

페르시아에서 처음 재배된 호두나무는 서양인들에게 오랜 신목(神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인 제우스를 위해 호두를 바쳤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제우스를 주피터로 바꿔 불렀고 호두나무는 주피터신의 열매로 추켜세웠다. ‘글란스 조비스(glans Jovis).’ 호두나무의 속명인 ‘주글란스(Juglans)’의 어원이란다.

 

‘天地人’ 품은 700번 결실

 이젠 가을의 전설로 남다

 

호두는 인간의 알쏭달쏭한 마음에 대한 환유(換喩)로도 쓰였다. 좀처럼 알아내기 어려운 타인의 속내를 점치는 일에 활용됐다. 북유럽에서는 11월1일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에 청춘 남녀들이 호두를 가지고 애정 운을 헤아리는 풍습이 있었다. 몰래 사모하고 있는 정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우면서 호두를 모닥불 속에 던졌다. 호두가 불길에 터지고 으깨지는 정도에 따라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호감도를 셈했다. 무명(無明)에 휩싸인 불성(佛性)을 비유하는 데에도 적절하리란 생각.

<사진>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된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위)와 호두(아래).

호두의 한자명은 호도(胡桃)다. <본초강목>은 “호도는 강호에 나며 한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종자를 가지고 온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90년에서 1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기원후 4세기 무렵부터는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본국이 아닌 모든 나라를 오랑캐로 깎아내리는 것은 중국의 고질적인 오만이다. 그래서 호(胡)라는 글자를 썼다. 결국 호도(胡桃)는 외국에서 건너온 복숭아라는 뜻이 된다.

호두가 국내에 들어온 때는 4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설이 많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 후기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전래 시기가 맨 마지막까지 뒤쳐져야 천안 광덕사(廣德寺)의 호두나무가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류청신(柳淸臣, ?~1329)이 귀국했다. 그의 손에는 호두나무의 묘목과 열매가 들려 있었다. 묘목은 광덕사에 심고 열매는 자신의 고향집 뜰에 심었다는 것이 고려시대 전래설의 기원이다. 광덕사 호두나무는 높이 18.2미터의 거목이다.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천안의 대표적 명물인 호두과자의 시조인 격이다. 안내판은 그의 후손과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광덕면 일대에 무려 25만 8000그루의 호두나무가 심겼다고 전한다. 어쩌면 대국에서 수입한 신상품으로 마을 전체가 합심해 크게 사업을 일으켰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하튼 광덕사의 호두나무는 출생의 진실 따윈 잊은 채 무럭무럭 자라났다. 조선 초기에 발간된 <농사직설>은 호두의 재배를 권장하면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가 특산지라고 명시했다. <목민심서>는 아홉 가지 구황작물의 하나로 저장성이 좋은 호두를 꼽았다. 일부는 야생에서 피기도 해 급기야 남한 전역에 퍼지게 됐다.

 

외과피는 하늘, 내과피는 땅, 과육은 사람을 상징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한 열매였던 셈이다.

사람의 머리를 닮고 사람의 머리에 좋은 호두는

사람의 머리를 사로잡고 사람의 머리에 앉았다.

자고로 쉽사리 자신을 들키지 말아야 대접받고 사는 법이다.


광덕사는 천안에서 온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태화산(泰華山)에 자리했다. 서기 652년 율사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 금은(金銀)으로 새긴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恩重經)> 각 2부를 봉안하며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 세조 재위 시 크게 번창했다. 수많은 정적을 죽이고 내쫓은 뒤 죄책감에 시달리던 세조는 불교에 귀의해 구원(舊怨)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를 풀고 경전을 한글로 옮겨 보급했다. 광덕사의 성세도 세조의 적극적인 불교 보호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1464년 광덕사에 들렀던 세조는 절에 국토를 떼어주고 역을 면제한다는 명을 내렸다. 절의 무엇에 감동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광덕사는 9개의 금당(金堂)과 89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로 거듭났다. 3층으로 된 천불전(千佛殿)은 전 국민의 구경거리였다. 임진왜란에 당하기 전까지다.

청신(淸臣). 그의 이력은 이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일찍이 몽골어를 익혀 역관으로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본래 천민들이 거주하던 부곡(部曲) 출신이었다. ‘향.소.부곡’할 때의 그 부곡이다. 부곡민들에겐 아무리 공이 출중해도 5품 이상의 벼슬은 주지 않는 게 국법이었다. 물론 국법 위에는 임금이 있었다. 류청신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정3품의 대우를 받았다. 장군, 대장군, 밀직승선, 감찰대부와 같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대국의 입김으로 언제 퇴출당할지 모를 임금보다 대국에 확실한 줄을 댄 신하의 신세가 곱절은 나았던 시절이다. 알다시피 몽골은 당시 초강대국이었다. 친미의 시대엔 영어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었고 친원의 시대엔 몽골어가 대세였다. 개경 환도를 강행하면서 고려의 조정은 원나라의 주구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리고 ‘팍스 몽골리카’의 세상에서 사직은 평화롭게 죽어갔다. 권신들은 고려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든 원나라에 속한 일개 성(省)으로 전락하든 괘념치 않았다. 특히 오직 개인의 능력으로 신분의 한계까지 갈아엎었던 류청신이라면 이기심을 지고의 가치로 삼았을 법하다.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 일말의 양심까지 쥐어짜 야망에 쏟아 부었고 끝내 몰락했다. 원나라에 체류하던 심양왕을 고려의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에 가담했고, 내정간섭기구인 정동행성의 설치를 건의하는 등 반역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국의 보복이 두려워 귀국하지도 못했다. 결국 원나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는 역신(逆臣)이다. 조국을 짓밟고 일으키려던 자아는 성사되지 않았고 끝내 역사에 짓밟혔다.

류청신의 성공가도는 고향에도 혜택을 입혔다. 그가 살던 고이(高伊) 부곡은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됐다.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이다. 호두나무의 열매를 묻은 곳이 여기가 아닌가 한다. 신천지의 작물을 이 땅에 이식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금의환향? 환골탈태? 세상을 향한 복수의 징표였을 수도, 차별을 극복해낸 스스로를 위한 건배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국은 멸한 지 오래고 그의 목숨을 삼킨 산하는 말이 없다.

<사진> 천안 광덕사 대웅전 앞 석사자상.

광덕사 석사자(石獅子)는 대웅전 중앙 계단에 좌우로 1구씩 놓였다. 입이 약간 벌어졌고 이빨이 조각됐다. 그저 자국만 낸 것일 뿐 사실감은 없다. 독특하게도, 사자의 얼굴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태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얼핏 사람의 행색이다. 승천에 실패한 인간이 멀어버린 눈을 받아들고 서 있다.

호두는 가을에 딴다. 9월 하순에서 10월 중순이 최적의 수확 시기다. 절을 내방한 날은 9월8일이다. 광덕사 호두나무에도 열매가 영글었다. 류청신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벌써 700번도 넘은 결실이다. 청설모가 이미 상당한 양을 가로챈 뒤여서 몇 점 안 남았다. 호두의 외과피는 녹색이다. 열매를 가지에서 떼어내면 외과피는 썩어 들어간다. 완전히 부패하기 전에 벗겨내면 우리에게 익숙한 갈색의 내과피가 드러난다. 두 겹의 껍질과 속살은 한민족에게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투영으로도 읽혔다. 외과피는 하늘, 내과피는 땅, 과육은 사람을 상징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한 열매였던 셈이다. 사람의 머리를 닮고 사람의 머리에 좋은 호두는 사람의 머리를 사로잡고 사람의 머리에 앉았다. 자고로 쉽사리 자신을 들키지 말아야 대접받고 사는 법이다.

천안=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62호/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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