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흥국사 대웅전. 영축산 봉우리가 대웅전 처마 위로 솟아 있다. 흥국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조화롭게 들어서 있어 경내가  짜임새 있으며, 가람배치는 아름다운 산사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중생과 부처 둘 아니다’ 실천 위해 창건

보조스님, 정혜결사 거점도량으로 삼아

의승군과 각별한 인연 있는 ‘호국도량’

요즘 절에 가면 입구부터 경내까지, 일주문이나 법당에 걸린 정부의 종교편향에 항의하는 현수막을 보곤 한다. 오죽하면 세간사에 무관심하려는 절간에서까지 이렇게 들고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절로 한숨이 나온다. TV에서 사중에서 열리는 규탄법회 내지 집회 등이 나올 때면 보통 착잡해지는 게 아니다. 불교를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건 바로 자신의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해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굳이 종교를 떠나서라도, 불교가 문화나 사상 면에서 이 땅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으니 불교를 홀대한다면 그건 곧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홀대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불교계 스스로가 불교가 나라와 사회에 공헌한 바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정리해 보여주는 데 소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뜻에서 나는 이 연재의 후반부를 한국불교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현장과 흔적을 찾아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먼저 호국불교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고, 먼저 오늘 내가 찾은 여수 흥국사도 바로 그러한 곳 중 하나다.

한국불교를 특징짓는 몇 가지 아이템 중에 호국불교란 게 있다. 글자 그대로 불교가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는 의미인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을 때 사찰이 병참기지가 되고 승려들이 군대에 합류하거나 나름의 군사조직을 갖추고 적극 대항했다는 이야기다.

신라시대의 화랑오계를 원광법사가 지은 것에서부터(화랑오계의 하나인 ‘살생유택’은, 곧 ‘대상을 가리면 생명을 죽여도 된다’는 말인데 이것이 과연 불교에서 할 만한 소리인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갖는 어떤 인사의 생각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시작된 호국불교의 도도한 흐름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라는 초미의 국난을 맞아 절정을 이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불교계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관군과 의병을 지원했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군사조직을 이루어 왜군과 직접 싸웠던 것이다. 이른바 의승군(義僧軍)이다.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서도 의승군의 활약은 적지 않았고, 종전 후에도 사찰 내의 특수 조직으로 남게 되었다.

본래 절에서는 평등과 무계급이 원칙이지만 그 동안 못된 유생들로부터 지겹도록 수탈을 당해온 사찰입장에선 그들의 존재가치를 톡톡히 인식시켜 준 승군의 전통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찰의 현판이나 불화의 화기(畵記)에 총섭이니 도총섭이니 하는 군사조직의 용어가 그대로 전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찰 내에서 군사훈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가에서도 이들을 예비전력으로 여겼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산성이 공수의 요처가 될 수밖에 없는 전투의 특성상 이러한 산성을 수호하고 유지하는데 산사의 승려들이 제격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에서는 평시 이러한 의승군의 조직 유지를 묵인하였을 뿐이다. 또 사찰은 사찰대로 누란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군과 싸웠던 활동을 은연 중 알림으로써 사찰의 운영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여수는 임진왜란 당시 격렬한 해전(海戰)으로 해가 뜨고 달이 지던 곳인데, 지금의 여수는 도저히 당시를 상상하기 힘들만큼 평화롭기 그지없다. 오동도, 거문도, 백도 등 조그만 섬들이 점점이 수놓은 여수 연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다. 경남 통영 한산도 부근에서 사천.남해 등을 거쳐 여수까지 이르는 한려수도 뱃길은 환상 그 자체다. 섬들을 연결하는 돌산대교도 멋있고, 규모가 작고 시설도 보잘것없지만 주변 풍광만큼은 최고인 여수공항도 매력적이다.

여수 흥국사 홍교. 1639년 지었다.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로, 기능성은 물론 미관이 뛰어나다. 당시 흥국사의 사세와 위치를 말해준다.

2012년에는 ‘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이라는 모토로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게 되어 한창 준비에 바쁘다. 그때가 되면 여수가 세계적 미항으로 꼽히는 나폴리나 베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미항으로 널리 알려질 것 같다. 세 곳 모두 다 가 본 여행자로써 감히 말하건대, 나폴리나 베니스가 알려진 것처럼 천상의 낙원은 아닐뿐더러, 여수도 그만한 잠재적 환경은 충분하기에 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아름다운 자연에 자리 잡은 사찰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을 본받고 있어서다. 흥국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지금 나는 호국의 사찰로써 흥국사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흥국사는 내소사나 선운사에 못잖은 아름다운 사찰, 곧 미찰(美刹)이다. 명찰, 대찰이라는 말은 잘 써도 미찰이라는 말은 안 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앞으로 이런 미찰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흥국사 일주문에 들어서기 홍교를 보기 위해 온 길을 조금 되짚어갔다. 홍교를 알리는 안내판이 요란스럽게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사람들은 홍교를 못보고 그대로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홍교란 말 그대로 무지개다리다. 무지개다리는 여느 석교에 비해 아름답기도 할뿐더러 공학적으로도 훨씬 튼튼하다. 짓기 쉬운 게 아니라서 많이 남아 있지는 않는데 사찰 내에 홍교가 제법 전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 사찰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곳이라는 의미가 되니까. 조선시대에 세운 홍교 몇 개가 전하는데, 선암사 승선교는 그 중 아름답기로 으뜸일 터이고, 그 밖에도 화엄사나 백양사 등에도 멋진 무지개다리가 있다. 많기로 말한다면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무려 5기의 홍교가 있으니 이쯤 되면 기네스북감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찰의 홍교와 마찬가지로 흥국사의 홍교도 사찰에서 마을사람들을 위해 지은 것이니 더욱 의미가 깊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경내가 나오는데, 조금 가다보면 왼쪽 둔덕에 부도들이 모여 있는 부도밭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을 비롯해서 법수(法修) 등 흥국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님들의 부도들이다. 지눌스님은 창건주이고, 법수스님은 정유재란 후 중건하는데 앞장섰던 분이다. 특히 지눌스님은 한국 선종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스님이라 그 부도를 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보통 지눌스님의 부도는 순천 송광사에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만큼 송광사와 지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일체화되어 있다. 하지만 흥국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는 건 이곳 역시 지눌스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 무렵의 지눌스님의 행적으로 한 번 살펴본다. 1703년에 쓴 <흥국사중수사적비>에 1196년 지눌이 흥국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므로 그의 흥국사 창건설은 부동의 사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송광사의 <보조국사비>에는 그가 이듬해인 1197년에 지리산의 무주암(無住庵)으로 거처를 옮겨 뜻을 같이하는 몇몇 스님과 함께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수행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수행하는 도중에도, 그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는 이를 실천할 도량을 찾기 위해 제자를 남방으로 보냈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의 부도. 지눌은 1196년 여수 흥국사를 창건해 정혜결사의 도량으로 삼았다. 순천 송광사에도 지눌스님 부도가 전해 오고 있다.

다시 그로부터 3년 뒤인 1200년에는 송광사로 옮겨 입적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말년은 뚜렷한 방향으로 목표를 세우고서 그것의 성취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흥국사를 창건한 것은 그가 뜻한 정혜결사의 운동의 한 거점으로서 생각했었다고 유추해 보게 한다. 그는 도저히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찰을 세울 수 있었을까 싶게 많은 절을 지었다. 1200년 이후 입적할 때까지 백운정사.적취암.규봉난야.조월암 등을 창건하거나 중건한 것이다. 나는 원효와 의상 스님 이후로 단기간에 이처럼 많은 사찰을 한꺼번에 세운 분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와 이상을 실천하고 구현할 도량을 의욕적으로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날 때 본 일군의 관광객들이 어느 새인가 그들 모두 나를 앞서 저만치 대웅전 앞에서 사진 찍느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 그나저나 저들은 과연 지눌스님을, 또 흥국사와 의승군과의 각별한 관계를 알기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문득 저들을 붙잡고 한바탕 설명이라도 해볼까 하는 충동이 이는 것을 어찌해야 하나.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61호/ 9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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