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가면 석탑 앞이나 전각 앞에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홀로 서서 고고한 멋을 부리는 석등을 보게 된다. 거의 일반인들은 탑이나 전각에만 관심을 보이나 정작 우리에게 지혜를 밝혀주는 석등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나 석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석등 하나하나 조형과문양의 의미를 알게 되면 저절로 합장 예경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암흑속 사바세계 중생위해

 

한줄기 ‘진리의 法’ 밝혀줘

 

왜냐면 석등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래(如來) 즉 등신불(等身佛)의 형태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에게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인 법(法)의 상징으로 석등은 표현되었다. 참으로 형이상학적인 해학이다. 법을 형상화할 수 있다니 1500년 전 우리조상님들의 지혜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등불을 밝히기 위하여 석조로 만들어진 등 기구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석등의 의미가 단순히 불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사진> 합천 영암사지 석등.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에 의하면 “불타(佛陀)의 진리인 광명은 암흑과도 같은 사바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불신(佛身)의 광명이 비치는 등명(燈明)으로 촌각도 지체 없이 선(善)한 경지로 인도하는 선봉이 된다”고 나타내고 있다.

초기불교의 교리 중 12연기가 있다. <장아함경>의 대연방편경에 보면 치(癡)또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 12가지에 의한 연기의 연쇄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 있기에 늙음과 죽음이 오는가? 치(무명)에 연(緣)하여 행이 있고 … 노사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치(무명)만 없으면 늙고 죽음도 없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석탑 범종과 같이 부처님 형상화…예배의 대상

기능만 있는 타종교와 달라…교리적 배경 담겨

燈明통해 善한 경지로 인도…조상의 지혜 감탄


 

밝지 않음, 무명은 어두움, 즉 치(癡), 어리석음(無知)이다. 인간에게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나고, 늙고 죽음도 없는 열반의 즐거움에 도달한다.

이로 인해 석등은 부처님 말씀인 진리의 빛으로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법을 구체적인 상징적 조형물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의 등불 또는 법신(法身)이라 표현한다.

부처님의 열반 시 남기신 말씀 중에 그 유명한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도 부처님의 말씀을 등불에 비유하신 대목이다.

그래서 석등 앞에는 예경을 할 수 있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석등의 구조물 또한 불상의 대좌 형태로 되어 있다. 하대석은 연꽃을 아래로 향하게 한 복련과 간주석은 사자나 용으로 조형되어 있기도 하고 상대석에 위로 피어 오른 앙련을 표현함으로써 연화좌 위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팔각 형태의 화사석 내부에 있는 불꽃은 진리의 등불인 법신 부처님을 상징한다.

<사진> 영주 부석사 석등.

화사석 바깥 4면에는 사천왕이 법신을 호위하거나 4보살이 법신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 위의 지붕돌은 전각내의 닫집과 같은 의미의 보개(寶蓋)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위의 꼭대기에는 깨달음의 상징인 보주가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석등의 조형은 석탑이나 범종과 함께 부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조형물로 예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석등은 곧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표현한 또 다른 부처님을 상징하는 훌륭한 조형물로 단순히 어두움을 비추는 타 종교에서의 등불과는 차원이 다른 교리적 배경을 조형으로 나타낸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탄복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석등 중에 모양이나 교리적 표현방법이나 가장 아름다운 석등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무량수전과 잘 어울리는 크기,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모습에 그 앞에 배례석까지 갖춘 금상첨화의 부처님의 다른 모습이다. 진리의 불빛이 비치는 창 옆에는 공양을 들고 생각에 잠긴 보살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부처님을 향한 예경의 극치로 지금 이 자리에 보살님이 나타나도 이렇게 석등에 예경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뿐히 연꽃을 즈려밟고 부처님께 드릴 공양물을 한손으로 받쳐 들고 무거운 듯 떨어질세라 다른 손을 올리며 얼굴을 약간 기울여 2곡 자세를 취하며 법열에 잠긴 듯 미소 짓는 표정이 법신에 대한 한없는 귀의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석등에 표현된 보살님의 넓고 깊은 통찰은 인간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법의 등불로 사라지게 하며 따뜻한 표정은 모든 것을 자비로 감싸는 듯한 자연스러운 해학은 한국인의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아름답다.

<사진> 부석사 석등의 공양 보살상.

또한 합천 영암사지 석등은 쌍사자 석등으로 통통하게 살찐 암수 두 마리의 사자가 뒷다리로 연꽃 위에 힘차게 서서 앞다리는 함께 모아서 부처님의 연꽃 자리를 날렵하게 들어 올린다.

‘부처님의 자리는 사자좌’라는 것을 알리려 하는 듯 뽐내고 있으며 그 위의 8각 화사석 사이에는 사천왕이 법신인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호위하며 지킨다. 하늘위로 치켜 날아갈 듯한 보개는 법신을 더욱 장엄한다. 비록 폐허가 된 사찰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전하려는 의지만은 굳세어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다.

영암사지 석등은 천년의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초연한 태도로 자연과 벗하는 달관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조상님들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또 하나의 멋진 석등이 있으니 그것은 군산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교정 뒤에 있는 석등이다.

용이 휘 감고 올라가는 특이한 조형의 이 석등은 간주석에 용이 나타나는 유일한 예로 타 석등과는 구별된다. 부처님을 지키겠다는 용의 서원이 진리의 등불인 석등을 지키는 호위 용으로 나타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한 마리의 용이 간주석을 세 번 휘감고 고른 이빨을 드러내고 힘찬 기운을 내뿜으며 코를 벌름거려 여의주를 잡으려 하는 생동감이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다. 이렇게 변화된 표현은 흥미를 갖게 하는 새로운 것으로 해학적인 느낌을 주게 한다. 익살의 미학은 익살스러움을 보는 자의 눈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진> 군산리 발산리 석등.

사찰의 석등처럼 불교에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물질적인 어두움보다는 마음이 어리석어서 보이지 않는 무명(無明)을 생사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마음이 혼미하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사람들은 ‘눈앞이 캄캄하다’고 하는 것 또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법등명(法燈明)을 형이상학적으로 상징화한 석등의 부처님께 삼배를 올려 생사 무명을 끊는 지혜를 가져보자.

권중서 / 조계종 전문포교사


[불교신문 2433호/ 6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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