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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11.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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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만공월면

 

불교에서 달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능엄경>에는 “달을 보라고 하니 손가락을 본다”는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은 깨달음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강을 건너면 뗏목이 필요 없듯 정각을 성취한 수행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전월사(轉月舍). ‘달을 굴리는 집’이란 뜻이다. 경허스님 법맥(法脈)을 계승한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스님이 만년(晩年)에 머물던 곳으로, 선지식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불교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자유자재하게 살았던 만공스님 처럼 눈이 내려앉은 덕숭산을 찾았다.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경허 법맥 이어‘진리의 길’로 납자 인도

 조선 독립 염원하며 일본 총독에 ‘일침’  

 

김좌진 장군과 인연 깊어

○… 만공스님은 홍성 출신의 김좌진 장군과 각별하게 지냈다. 18살 차이가 났지만 조선독립이라는 공통된 소원과 열린 마음을 지녔기에 의기투합했다. ‘갈미 김씨’ 불리는 김 장군 집안은 선대에 스님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우호적이었다.

덕숭총림 정혜사 능인선원 앞 눈 쌓인 만공대. 만공스님이 좌선하던 곳이다. 만공대 오른쪽으로 스님이 주석한 금선대가 있다.

이런 인연으로 만공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막역했다. 덕숭총림 수좌 설정스님은 “두분은 정신적인 면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장사였다”면서 은사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교자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 “오늘은 힘 한번 시험 하시죠” “소승이 무슨 힘이 있겠소.” 장군이 앉은 자리서 상을 뛰어 넘었다. 스님은 “대단하시네요”라고 칭찬했다. “저도 했으니, 스님도 한번 해 보세요” 사양하던 스님은 가부좌인 채로 몸을 날려 장군 뒤에 가서 앉았다. 홍성에 구전되는 또 다른 이야기. 이번에는 팔씨름으로 힘을 겨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일어나 보니 방구들이 꺼져 있었다. 설정스님은 “힘내기를 했다기 보다는 두 분이 친분을 나눴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간월암 복원 불사로 독립 염원

○… 안면도 간월암은 무학대사와 인연 있던 도량이다. 하지만 권세 있는 집안에서 절을 없애고 조상의 묘를 썼다. 간월암 복원불사 원력을 만공스님이 세운 것은 조선 개국도량이라는 상징성에 착안해 독립을 발원하고, 피폐해진 조선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는 이장 비용을 스님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복원을 허용했다. 벽초스님에게 소임을 맡기고 복원에 들어갔다. 수덕사를 오가며 복원 불사를 지도했던 만공스님이 불사를 회향하는 날 지은 게송은 독립을 염원했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한글풀이는 설정스님.

佛祖不友客(불조불우객)

何事碧波親(하사벽파친)

我本半島人(아본반도인)

自然如是止(자연여시지)

“부처님과 조사와도 친하지 않은 내가 / 무엇 때문에 푸른 물결과 친했단 말인가 / 나는 본래 반도인 이다 / 자연히 이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편 만공스님은 벽초스님과 원담스님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1000일 기도를 간월암에서 거행하도록 했다. “기도가 끝나는 날 해방 될 것”이라는 스님의 예언처럼 해방의 낭보가 전해졌다. 만공스님과의 인연으로 결제 회향일이면 수덕사 스님들은 간월암을 순례하고 기도를 올렸다.

 

“불교 망친 총독 지옥에 있다”

○… 총독부 주최로 열린 전국주지대회에서 스님은 “조선불교를 망친 데라우치 총독 이하 공범자들은 아비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여기는 파사현정하는 공석인데, 이런 정당한 말을 못하고 어디서 할 것인가”라며 미나미 총독과 친일 주지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소식을 들은 만해스님이 “봉(棒)을 하지, 왜 할(喝)을 하셨냐”며 반기자, “사자는 할을 한다”며 웃었다. 스님의 독립 열망은 강했다. 수덕사에서 단 한명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한편 스님은 절친했던 만해스님에게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라고 염려했다. “해방 되고 나서 잘 해야 되는데, 걱정입니다. 잘못되면 분열되어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만공스님은 “애를 낳는 것 보다 어떻게 키우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조선의 미래를 걱정했다. 해방후 좌우대립, 분단, 외세 간섭, 전쟁 등 스님의 염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절대 세상에 나서지 말라”

○… 만공스님이 원적에 든 1946년은 해방 직후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좌익 활동을 했다. 일본 예술대학을 나온 상좌인 중은스님도 그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세상에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거듭 중(重)과 숨을 은(隱)을 넣은 법명을 지어 주었다. ‘거듭거듭 숨으라’는 의미였다. 이 같은 당부에도 은사스님 입적후 세상에 나온 중은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었다. 정혜사 앞 만공탑을 디자인 한 인물이 바로 중은스님이다. 당시로는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한글로 ‘만공탑’이란 쓴 글씨,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조각, ‘만공월면’을 표현한 구(球),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씨도 넣었다. 좌우 대립의 희생양이 된 상좌가 디자인한 만공탑에 들어 있는 세계일화는 생전에 무궁화를 이용한 근화필(槿花筆)을 즐겨 쓴 만공스님 친필이다. 설정스님은 “모든 생명은 차별 없이 하나임을 꽃에 비유한 것”이라며 세계일화 의미를 설명했다.

<사진> 깨달음 이룬 봉곡사 범종.

홍성까지 들렸던 정혜사 종

○… 정혜사 범종은 홍성까지 소리가 들렸을 정도로 웅장했다. 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종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만공스님은 “절대 안 된다”며 거절했다. “중생의 무명과 번뇌를 걷어주는 성물(聖物)인 범종은 법기(法器)인데, 그것으로 무기를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일제는 집요했다. 주지 정동산스님을 압박했지만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만공스님을 잡아갈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수시로 협박을 일삼자, 동산스님은 만공스님의 안위를 걱정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저 사람들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결국 정혜사 종은 덕숭산 상봉으로 옮겨져 한티고개(광천리) 쪽으로 던져졌다.

 

마지막까지 시봉한 원담스님

○… 전월사에 주석할 때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이 시봉 했다. 정진 잘하는 원담스님을 기특하게 여겼다. 수시로 점검하고 안목이 열리도록 지도했다. “진성(원담스님 법명)이는 과거에 많은 정진을 했던 선근이 있어, 앞으로 선가(禪家)에 큰일을 할 것이야.” 입적을 예감한 만공스님은 전월사에서 둥근 거울을 보고 “너와 나의 오늘, 마지막 이별이다 ”라고 한 후 산내 암자를 순례했다.

시자 원담스님의 부축을 받으며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정혜사로 돌아온 스님은 “너희들은 정진을 잘 하라”고 당부했다. 원적처를 정혜사로 삼은 것은 전월사에서 입적하면 대중을 번거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초당(草堂) 옆 솔밭에서 다비를 모셨다. 설정스님은 “덕숭산 가풍은 경허.만공선사도 그렇지만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공연히 상 내고 요란 떨지 말라는 것이 어른들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수덕사=이성수 기자

 

 

행  장 /

 

 정체성 확립 ‘앞장’

마하연 조실도 지내

 

1871년 3월7일 전북 태인(정읍) 출생. 세속 이름은 송도암(宋道巖). 13세에 김제 금산사, 전주 봉서사, 논산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巖)스님 문하서 행자로 생활했다. 이듬해인 1884년 10월 경허스님 권유로 서산 천장암 태허(泰虛)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1895년 여름 아산 봉곡사에서 새벽 범종을 치며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게송을 읊다가 깨달음을 맛보았다. 그 뒤 경허스님의 경책을 받고 공주 마곡사,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에서 정진했다. 1901년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또 다시 새벽 범종소리에 크게 깨달음을 이뤘다.

1904년 입전수수(入廛垂手)하기 위해 북녘으로 향하던 경허스님을 서산 천장암에서 만나 전법게와 법호 만공(滿空)을 받았다. 1905년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행하며 수좌들을 맞이했다. 1933년부터 유점사 금강선원과 마하연 선원 조실을 지냈으며, 1935년 5월 마곡사 주지로 추대됐다.

<사진> 서산 천장암에 있는 만공스님 사진.

만공스님은 수덕사.정혜사.견성암.간월암을 중창 또는 복원했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 설립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대 중반 ‘조선불교선학원종무원’ 종정을 지내는 등 일본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근처 전월사에 머물며 선풍을 일으켰다. 1946년 10월20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62세.

만공스님 제자로는 비구 보월(寶月).용음(龍吟).고봉(高峰).금봉(錦峰).서경(西耕).혜암(惠庵).전강(田岡).금오(金烏).춘성(春城).벽초(碧超).원담(圓潭)스님과 비구니 법희(法喜).만성(萬性).일엽(一葉)스님 등이 있다. 진영은 정혜사 금선대와 동학사 조사전 등에 모셔져 있다. 금선대에는 경허스님과 혜월스님 진영도 봉안돼 있으며, 수월스님 진영도 곧 모셔질 예정이다.

 

[불교신문 2397호/ 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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