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번뇌 반야심경으로 씻었지요”

불자배우 엄앵란씨는 “삶은 어린아이 기저귀와 같이 뽀송뽀송하고 기분 좋은 날이 있으면, 이어서 괴롭고 힘겨운 날이 오기 마련”이라며 〈반야심경〉을 통해서 삶의 진리를 체득한다고 전했다.

 브라운관서 제2전성기 누리다 남편일로 마음 고생

“인생은 기저귀…처음에는 뽀송뽀송하지만…” 달관

 

국민배우 엄앵란(70)씨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상기돼 있었다. 지난 2월10일 서울 강남의 오피스텔에서 만난 그녀는 도저히 고희(古稀)를 맞은 얼굴로 믿기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 빨간색 자켓은 물론, 나이보다 20년은 젊어 뵈는 ‘뽀얀’ 피부는 수십년 분장에 찌든 동년배 여배우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다. 고른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고 화통하게 웃는 특유의 웃음소리 역시 신선하다. 그러고 보니 기자의 눈치가 너무 느렸다. 바로 전날, 남편 강신성일 전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된 것. 그녀는 장황한 표현 대신 “황송하고 감사할 뿐, 여생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눈동자와 입매 손짓과 표정 어디를 봐도 그녀의 기분은 분명 ‘업(up)’돼 있었다.

“열여섯살에 떡장사를 하며 피눈물 흘리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여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도 언제나 힘겨운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돌고 돌더라구요. 들어가면 나와야 하고 피면 지고 지면 썩고, 썩으면 다시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만들잖아요. 이토록 당연한 진리를 깨우치기가 이다지도 어려울 줄이야…” 텔레비전서 인기 패널로 초청돼 남녀상생.가정평화의 조정자와 전령자로서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녀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는, 누구나 그렇듯 눈물을 머금고 말끝을 흐렸다.

엄앵란씨도 힘겨운 인생사에 불법(佛法)을 등불로 삼아온 독실한 불자다. 어려울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마음을 다잡고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평생 입으로 줄줄 외는 반야심경…. 그 반야심경만 제대로 새기고 심오한 뜻을 잃지 않고 산다면 삶의 고통은 충분히 여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삶의 진리는 물론 불교의 요체도 반야심경에 모두 들어있지 않나요?” 엄 씨는 “공(空)의 의미와 괴로움의 원인을 고뇌하고, 불생불멸의 생활과 걸림없고 진실불허한 삶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서울에 있는 진관사에 찾아가서 스님께 ‘제 생일이니 생일불공을 올려달라’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지만 그 때는 내가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제 불공을 스스로 가서 드리고자 했던 것이죠. 제 청을 들은 스님은 ‘나를 있게 해준 부모님께 올리는 불공이 진정한 불공’이라며 한참동안 법문을 해주셨어요. 불교는 자성을 통해 타인을 구하여 결국 모두가 상생하는 원리로 이끌어주는 만큼, 그 날 이후 가정의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셈이죠.”

그녀가 여배우로서 인기 절정의 전성기를 누리다 은막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 최고 인기 미남배우 강신성일(당시 신성일)씨와 결혼한 이후다. 30여년간 전업주부로 남편 내조와 자녀양육에 전념하던 그녀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5년 KBS 주부 대상 간판프로그램 ‘아침마당’을 통해서다. 그녀는 시원통쾌한 입장을 털털하게 드러내주면서 복잡미묘한 가정사를 충고하고 조정, 화해시키기까지 했다. 지나친 호통과 직설적인 화법에 눈살을 찌푸리는 시청자도 간간이 있었지만, 그녀가 수십년간 아내와 어머니로서 쌓은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데 이론을 다는 이는 없다. 화합을 통한 남녀상생, 가정평화 등에 일조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그가 방송을 다시 접은 것은 남편 강 전 의원의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도덕적 책임감 때문이다. 당연한 처사라는 여론에 반해 일각에서는 가혹한 처사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 제3의 인생을 향해 당당하고 건강하게 걷고 있다. “인생은 어린 아기 기저귀와 똑같아요. 처음 찼을 때는 뽀송뽀송하지만, 어느새 거침없이 젖어들게 마련이고 또다시 새 것으로 갈아끼우면 좋은 시절은 잠시 뿐 또다시 젖고 또다시 더럽혀지고…” ‘기저귀 이론’을 강조하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번뇌망상의 집착을 한겹 벗어낸 자유가 깃들어져 있다. 1950년대 한국의 오드리헵번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엄앵란에겐, 그 때나 지금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만이 오롯이 새겨진 듯 하다.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불교신문 2306호/ 3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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