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상함 깨닫게 하는 불자의 장례법

타인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거나 괴로움을 받는 것을 “시달림을 받는다” “시달림을 당한다”라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이 ‘시달림’이라는 말은 불교의 ‘시다림(尸陀林)’에서 나왔다. 시다림은 범어의 시타바나(Sitavana)를 음역한 것으로, 이는 ‘차가운(寒)’이라는 뜻이다. 바나는 숲(林)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한림(寒林)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시다림은 요즘말로 공동묘지다. 당시 인도는 매장이 아니라 조장(鳥葬) 풍습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버렸기 때문에 시다림에는 사람의 시신이 가득했다. 〈사분율〉에 따르면 시타바나는 중인도의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에 있는 숲이었다. 시다림은 공포의 장소였으며 질병이 무성한 곳이었다. 후일 나라에서 이 시다림에 악성 죄인들을 추방시켜 살게 했다고 한다. 부처님은 고행의 장소로 이 시다림을 이용했다. 12두타행 가운데 무상관(無常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는 총간주(塚間住)는 바로 시다림에서 생활하라는 뜻이다. 새의 먹이가 되도록 버려진 시체 더미에서 사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시신들 틈에서 살도록 한 이유는 육체의 허망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신들 사이에서 지내야 하는 수행자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시다림이 시달린다는 뜻으로 전환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수행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무소유를 생명으로 삼는 수행자들에게 의복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당시 비구들은 버려진 시체 더미를 뒤져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의복으로 삼았다. 스님들의 옷을 뜻하는 분소의(糞掃衣)는 바로 죽은 사람이 입고 있던 헤진 옷을 말한다. 〈해탈도론〉 권2에는 “무덤 사이나 쓰레기 더미에나 시장이거나 도로에 있는 것을 주워서 자르고 빨아 염색하고 가리고 이어서 재봉하여 수지하는 것을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잘라내고 남은 것이거나 소나 쥐가 물어버린 것, 혹은 불에 타버린 것이거나 사람이 던져버린 것, 시신을 덮은 옷이나 혹은 외도의 옷 등을 세상 사람들이 버린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보시를 받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의 옷은 임자가 없기 때문에 무소유 정신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시신과 함께 살면서 온몸으로 생과 사의 구분 없음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인도의 장의법은 시신을 태우는 다비와 더불어 조장(鳥葬), 풍장(風葬)이 유행했다. 사실 다비는 부처님 이후 불교 고유의 장의법으로 정착됐다. 현재 인도는 물에 던지는 수장(水葬)이 일반적인 장의법으로 정착됐다. 인도 인근의 티벳 등은 여전히 풍장과 조장 중심이다. 시신을 태우거나 새의 먹이로 던지는 풍습은 인간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로 구성돼 인연이 다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흩어진다는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일시적으로 뭉쳤다 흩어지는 존재 이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조장 풍습서 유래…몸의 애착버리는 수행법으로 사용스님 ‘시다림’부담느껴 재가신자 상조회서 해주기도하지만 인식과 달리 몸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버리기 힘들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묘지에서 살도록 한 것이다. 시신이 썩어서 흉측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육체를 탐하는 애욕을 끊고 결국은 사라져 한점도 남지 않는 과정을 지켜보며 죽음의 무상함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묘지에서 시체를 보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한다. 부정관에는 9가지의 단계가 있다. 〈대념처경〉에 따르면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묘지로 가서 시신의 모습을 보면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관찰하는데 모발, 손톱, 간, 폐, 위장, 비장, 콩팥, 오장, 땀 뼈, 골수, 뇌, 소변, 대변, 눈물, 숨쉬는 것 등 인간 육체의 전반에 걸쳐 하나하나의 부분을 관찰한다. 시신이 점차 부풀어 오르면서 뼈만 남고 그 뼈마저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육체의 허망함을 관찰한다. 이 부정관은 수행의 초기 단계에 들어선 사람이 주로 사용한다. 부정관은 또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탐욕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며 싸우고자 하는 마음과 도적질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안으로 자신만을 높이는 아만심과 이기심 등이 없어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정관을 잘못 닦게 되면 염세관을 갖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므로 부정관의 참뜻을 잘 알고 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이 부정관은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불교권에서는 지금도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만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묘지에서의 관찰은 불가능하다. 대신 태국에서는 스님들에게 의과 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의 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가 태국에서는 일반화 돼있다. 태국의 동북 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방콕의 교외에 있는 한 수행처에서는 죽은 시체 네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고 한다. 시다림은 이후 불교의 한 장례법으로 정착됐다. 인도와 달리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신자들은 흙속에 묻는 매장을 했지만 시다림이라는 불교식 장례법을 만들었다. 시다림을 흔히 ‘시다림법문’이라고 하는데 신라시대 이후 관습화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다. 오늘날에도 불자들의 가정에서는 장례법으로 널리 퍼져있다. 〈석문의범〉에는 시다림의 의례 절차가 나온다. 사람이 죽으면 영단과 오방번을 설치한 뒤 오방례를 올린다. 오방례(五方禮)란 동.서.남.북.중앙에 있는 부처님들께 예배드리고 영가를 부탁하는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극락세계가 일정한 장소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방 부처님을 안내해주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걱정하지 말고 그곳의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일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계(無常戒)를 일러주고 입관하기 전에 삭발.목욕의식을 행해준다. 무상계는 무상의 원인과 결과를 밝혀 영가로 하여금 무상의 원리에 좌우되는 인생관을 초월하도록 일러주는 법문이다. 화엄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법화(法華)의 보문품(普門品)과 더불어 가장 널리 유통되는 장구(章句)인 〈원각경〉 보안장의 내용이 들어있다. 시신을 삭발 목욕 세수하는 것을 염습(焰襲)이라고 한다. 삭발.목욕편에 이어 세수.세족으로 유체를 청결히 하고 속옷과 겉옷을 입혀주는 착군(着裙)과 착의.복건을 쓰는 착관(着冠)을 행하고 정좌시식을 한다. 모든 의식을 집행할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법문이 있게 되는데 정좌편에서는 “영가시여!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드러나 근진(根塵)을 벗고 또렷하게 나타나 있으니 문자와 언어에 구애 될 것이 없다. 참다운 성품은 물듦이 없이 본래부터 원만하니 단지 망념만을 여의면 곧 부처님의 경지이다”라는 법문을 한다. 그 다음 안좌게를 한 뒤 입관한다. 영결식을 한 뒤 화장장이나 매장장으로 향하면 시다림은 끝난다. 시다림의 핵심은 생과 사의 무상함을 알아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금강경〉 〈반야심경〉등을 독송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뜻에서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을 염송한다. 불교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평소 잘 아는 스님이나 사찰에 연락한다. 스님은 목탁과 요령 의식집을 준비해서 상가(喪家)를 방문한다. 스님들은 이 때 ‘시다림 간다’고 한다. 망자를 위한 의식을 행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답례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유한 신자들이 아니면 스님들의 시다림 법문을 청하기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스님을 부르지 못하는 집에서는 〈금강경 〉 독송 테이프로 대신한다. 하지만 생전에 독실했던 불교신자인 가족을 떠나보내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려주지 못하면 유가족들의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재가신자들만의 상조회다. 신도들 끼리 상조회를 조직해서 시다림 하는 법을 배워 서로 돌아가며 베푸는 것이다. 최근에는 포교사단 내에 시다림을 전문으로 하는 모임이 결성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요즘은 시다림을 해주는 것을 ‘장의봉사’라며 복지의 일종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시다림은 망자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큰 힘을 준다. 경전을 듣고 망자가 극락왕생 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또 독경은 유족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줘 여유를 찾게 해준다. 이 때문에 시다림을 배우려는 불교신자들이 점차 늘어난다고 한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사진: 어느 유명 기업가의 빈소를 찾은 스님들. 독경은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을 준다.[불교신문 2092호/ 12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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