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진리 형상화한 ‘광명의 부처님’

사진설명: 진리의 당체인 비로자나불은 부처님 가르침을 형상화.이념화 한 존재다. 태양 혹은 광명이란 뜻이며, 어디에도 존재하는 태양빛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며 가득 차 있다. 사진은 중국 운강석굴 제18굴의 주불인 비로자나불.
환하게 밝은 빛 광명(光明). 밝음 보다 ‘어둠’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광명’을 더 좋아한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 속에 ‘어둠’으로 생긴 모든 ‘괴로움’과 ‘나쁜 것’들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 마음속의 번뇌, 몸과 마음과 뜻으로 만든 삼독(三毒), 과거의 불행했던 일까지 광명 속에 드러내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갈망한다.

어둠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밤(夜)’은 휴식과 평안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어둠마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둠’ 보다는 ‘밝음’이, 암흑으로 대변되는 ‘악(惡)’보다는 광명으로 대표되는 ‘선(善)’이 더 좋은 것은 사실이다. 불교 역시 광명을 강조한다. ‘어둠’으로 표현되는 ‘무명(無明)’을 극복한 ‘깨달음’이 바로 ‘광명’이기 때문이다. 탐욕.어리석음.성냄의 어둠을 이겨낸 밝음이 광명이고 깨달음인 것이다. 태양이 비치지 않은 곳이 없듯 깨달음은 세상을 두루 비춰 중생들에게 희망과 안락과 즐거움을 준다. 광명을 이념화.형상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광명’ 혹은 ‘태양’이란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옮긴 ‘비로자나’는 - 노사나(盧舍那) 혹은 비루차나(毘樓遮那) - 〈잡아함경〉 권22에 보인다. “모든 어둠을 깨뜨리고 광명을 허공에 비추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청정한 광명이 이제 나타났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비로자나의 본뜻이 ‘태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424~453. 劉宋 曇無密多 옮김)에 오면 “석가모니불을, 모든 곳을 두루 비치는 비로자나라 이름하고 그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상적광(常寂光)이라 한다”고 해,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임을 명시한다. 부처님의 덕화가 우주에 충만한 것이 마치 태양이 우주에 가득한 것과 같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나아가 〈화엄경〉은 “석가모니불이 바로 비로자나불”임을 밝힌다. ‘60 화엄’(420. 동진 불타발타라 한역) 권4 ‘여래명호품’에 “이 사천하의 불호(佛號)가 같지 않으니 실달(悉達)이라 하고, 만월(滿月)이라 하며, 사자후(獅子吼)라 하고, 석가모니라 하며, 노사나(盧舍那)라 하며, 구담(瞿曇)이라 하고, 대사문(大沙門)이라 하며, 최승(最勝)이라 하고, 능도(能度)라 하여 이런 부처님 이름이 1만 가지나 된다”고 나온다. ‘80 화엄’(699. 唐 실차난타 한역) 권12 ‘여래명호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만 노사나(盧舍那)를 비로차나(毘盧遮那)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구마라집 스님이 406년에 한역한 〈범망경〉 ‘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제10상권에는 “나는 이미 백아승지겁에 심지(心地)를 닦아 범부를 벗어나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니 노사나라 부른다. 연화대장세계해(蓮花臺藏世界海)에 머무는데 그 대 주변에는 천 개의 꽃잎이 있고, 한 잎이 한 세계로 천(千) 세계가 되며 나는 변화해 천(千)의 석가가 되어 천세계에 의거한다. 다시 일엽세계(一葉世界)에 이르면 또한 백억 수미산, 백억 일월, 백억 사천하, 백억 남염부제가 있어, 백억 보살과 석가가 백억 보리수 아래 앉아 각각 그대가 물은 바 ‘보리살타심지’를 설할 것이며, 나머지 999 석가도 각각 천백억 석가를 나타내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천 개의 꽃 위에 있는 부처는 내 화신이고, 천백억 석가는 천(千) 석가의 화신이라, 나는 이미 본원(本原)이 되어 노사나불이라 이름 한다”고 해,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불의 본신불(本身佛)로 이념화된다. 특히 밀교 경전인 〈대일경〉 등은 ‘마하-비로자나(Maha-virocana)’를 대일여래라 하여 전(全) 법계(法界)의 본체로 보며, 본체를 법성(法性)의 양 면인 리(理)와 지(智)로 나눠, 이법신(理法身)을 태장계 교주로 하고, 지법신(智法身)을 금강계 교주로 파악한다.

진리를 쥔듯한 ‘지권인’손모양에 결가부좌 모습

태양의 광명서 유래… 대적광전.대광명전 봉안


사진설명: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이 비로자나불인데, 왜 비로자나불이 필요할까. 비로자나불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역사적 부처님인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제자들은 유골(遺骨)을 통해 그 분의 체취를 느꼈지만, 그것만으론 무엇인가 부족했다.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권위’를 어떤 형태로든 찾으려 노력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별개의 인격적 존재’로서 다른 부처님을 찾으려는 노력과 ‘석가모니 부처님 안에서 여러 차원의 부처님’을 분별하는 노력이 시도했다. 두 가지 노력 가운데 전자가 먼저 결실을 거뒀다.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깨달음 분이 부처님이라면 과거에도 있을 수 있고, 미래에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그래서 태어난 부처님이 과거불(연등불)과 미래불(미륵불)이다.

그러나 미래불은 ‘56억7000만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이라도 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부처님, 다른 국토의 부처님을 찾게 됐다. 타방불(他方佛)혹은 타토불(他土佛)은 이래서 태어났다. 동방묘희세계의 아촉불,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은 대표적 타방불이다. 타방불 사상은 사방불(四方佛).시방불(十方佛)로 발전했지만, 타방불도 문제는 있다. 현재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이 아니고 죽어 왕생해야만 볼 수 있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이 세계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이 등장했다. 〈화엄경〉의 주불이자 광명과 태양의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이 그 분이다. 어디에도 존재하는 태양빛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며 가득 차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탄생된 것이다.

이와 달리 석가모니 부처님 내부에서 여러 부처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인 ‘법신(法身)’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당체인 ‘색신(色身)’을 - 이를 ‘이신설(二身說)’이라 한다 - 만들어 냈다. 시간이 지나고 교리가 발달함에 따라 ‘영원한 본체신(本體身)으로서의 법신’과 ‘현실적.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색신’의 관계도 변했다.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 사상으로 발전되고 전개된 것. 이신설의 법신은 영원성은 있으나 현실적 구체성이 없고, 색신은 현실적 구체성은 있으나 무상한 몸이라 영원성은 갖추지 못했다. ‘영원성’과 ‘현실적 구체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부처님인 보신불이 필요했다. 때문에 보신불은 ‘영원한 본체신으로서의 법신’과 ‘현실적 구체성을 띤 색신’이 통합된 불신(佛身)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체신인 ‘법신(광명이 두루 비치는 덕성을 가진 비로자나불)’으로 정립되고, 법신이 중생제도를 위해 사람 모습으로 화현한 것이 ‘응신(혹은 화신. 중생계에 태어난 역사적 부처님인 석가모니불)’이며, 응신으로서의 부처님이 특별한 수행을 해 그 과보로 법신의 영원성마저 성취한 것이 ‘보신(5겁에 걸친 특별한 수행을 통해 수명과 광명이 무량한 경지를 성취한 아미타불)’인 것이다.

법신불 비로자나불은 ‘진리의 당체(當體)’이기에 조각과 그림의 주요한 대상이 됐다. 누구나 진리를 갖고 싶어 하고, 누구나 진리 앞에 자신을 던지고 싶고, 누구나 자기가 진리와 둘이 아님을 보여주고 인식하고 행동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를 감아 쥔 듯한 손모양의 ‘지권인(智拳印)’을 한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인데, 인도나 파키스탄에서는 보기 힘들다. 대신 중국(운강석굴 제18굴 주불)과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서는 특히 많이 조성됐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전각을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라고 한다. 이들 전각 안에는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봉안된다. 반면 비로전 또는 화엄전이라 할 때는 비로자나불만 모신 것이 상례며, 비로자나후불탱화가 봉안되기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대개 지권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있다. 고려 말부터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국사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좌상, 통도사 대광명전의 법신탱화,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해인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 등이 대표적이다.

진리를 상징화한 비로자나불을 볼 때마다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 진리는 독점되는 것도, 고정불변 하는 존재가 아닌 실천과 결부된 존재라는 점이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리는 벌써 저만치 가 있고, 실천이 없는 진리는 공허할 따름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해도 중생들에게 베풀어지고, 회향되지 않는 한, 한낱 ‘화석화된 교시’에 불과하다. 자비와 역지사지(易之思之)를 아무리 외쳐도 보살행이 없으면 별무소용이라는 것을, 비로자나불은 지금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불교신문 2057호/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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