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7월의 장마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내밀며 보기드물게 하늘이 맑은서울의 여름날.용산 한미연사령부의 2층집무실 창가에서 연병장을 내려다보는 한 장군의가슴에는 회한이 서려있다.조국과 민족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내는 일 또한 중생을 구하는 보살도의구현으로 여기고 평생동안 참다운 군인의 길만을 찾아 걸어온 육군소장이석복장군(53.한미연합사 부참모장).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이자 수많은 부하장병을 거느린 군지휘관으로진솔하게 살겠다는 신념으로 앞만보고 달려온 30여년의 군생활. 신념과 사명감으로 군인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겨 고집스럽게 살아왔던 삶이었기에 지나간 세월은 보람에 앞서 참회와 반성이 앞선다.후회없는 삶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청춘을 불살랐던 군생활에 있어 전역을앞둔 이 순간에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가난했던집안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생각과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통일을 이루어보겠다는 생각에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장군은 육사를 21기로 졸업한 65년 육군소위로 임관, 8사단 포병대대에배치되면서 30년동안의 본격적인 군인보살의 길을 시작했다.불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사찰을 찾았고 육사시절에는 꾸준히 법당을 찾았지만 부처님가르침을 군지휘관의 신념으로굳히고 불자로서의 삶을 굳히게 된 것은 20사단 표병연대장에 부임하면서부터다.참다운 블자의 마음이 곧 군인의 길이요 지휘관의 자세라고 믿고 부대를지휘했던 것이다. 이후 "부대 지휘 방침은 불교사상에서"라는 신념은 90년7월 5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꽃을 피웠다.사단장 부임과 함께 매일 새벽 5시30분이면 군법당에서 하루일과를 예불참여와 108배로 시작하는 수행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사단장으로 지낸 3년동안 훈련등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108참회기도를 했다.이때 장군의 기도는 자신의 안위를 바라는 기도가 아닌,조국과 민족의 통일의 염원, 부모곁을 떠나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있는 부하장병들의 건강,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님들의 평안에 대한 서원이었다.그리고 많은 부하를 거느린 지휘관, 가족을 책임져야할 가장,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알게 모르게 범한 잘못된 업보를 참회하는 보살의 기도였다.당시 군종참모로 장군을 보좌했던 한상길법사(호국원광사 주지)는 "생활자체가 철저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며 "장군의 수행 모습은 법사들마저숙연할 정도였다"고 전한다.이때 장군은 자신만의 수행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장병들에게 "사병 1종교갖기운동"을 전개, 종교를 통한 정신전력강화에도 앞장선다. 우선 종교활동공간확보를 위해 7동의 군법당건립, 종각OP 오층사리탑건립 등의 불사를추진했고 교회 성당등 타종교시설의 확충에도 많은 배려를 통해 참다운종교인과 사려깊은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이와함께 매주 신병교육대에 군목사 군신부 군승법사를 파견, 사병들이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종교활동에 많은 배려를 해 군종장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이러한 장군의 종교를 통한 정신전력강화 방침은 곧바로 결실을 맺었다.91년 5사단은 최우 수부대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던 것이다.이외에도 군생활동안 인헌무 공훈장 美근무공로훈장등 군내외로부터 10개이상의 훈장과 포상을 받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이와함께 장군의 사단장시절 발생했던 "탈영병 사건"은 군법사들사이에5사단의 영험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부대훈련중이던 92년, 부대잔류병력중사병5명이 상급자에 대한 불만으로 무장을 하고 탈영했다.탈영병들은 차량을 탈취, 서울에 가려고 차량통행이 빈번한 국도에서 잠복했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평소에는 차량통행이 많던 국도에 2시간이 넘도록한 대의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안해 진 일부 탈영병은 부대로 자진복귀했고 남아있던 탈영병도 보고를 받고 출동 한 병력에 의해 체포되어 사건이 원만히해결됐다.자칫 사회혼란, 군위상 실 추, 장군의 군경력에 큰 오점이 됐을 이 사건이기적적으로 해결되자 주위에 서는 한결같이 장군의 불심에 의한 부처님의가피였다고 입을 모았다."무엇 보다도 탈영한 병사들이 한순간의 실수로 도리킬 수 없는 상황에빠졌다면 그들과 부모들이 큰 상처를 입을 것"이라며 "그때를 생각하면아직도 아찔하다"며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그러나 장군은 군생활을 마감하면서 보람에 앞서 가슴 아픈일을 떠올렸다."포병대대장시절 지뢰폭발로 3명의 부하들이 순직한 사건은 후에 위령탑을세워 영령을 추모하고 수시로 국립묘지를 찾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을느낀다며 가슴아파했다."또 국방부신도회장시절 발생한 17사단 훼불사건과 김대통령 국방부교회예배사건에 많은 갈등과 번민이 있었다며 "지휘관과 공직자는 편협된 사고를 버리고 균형있는 종교관을 가져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충고한다.전역과 함께 제일 먼저 해인사의 암자를 찾아 "이제는 옆을 가리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장군은 "무사히전역할 수 있는 것은 그간 사찰불사금을 종각OP 오층탑불사에 전액 보시해준 스님을 비롯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스님들과 법사님들 덕분"이라며전역의 소감을 밝혔다.이렇듯 전역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부하직원에 가슴아파하고 공덕을 주위사람들에게 돌리는 겸허한 마음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군인의 모습을찾을 수 있었다.어쩌면 장군의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진짜 군인"을 볼 수 있음은 한때군인에서 정권 야욕의 욕심으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권좌에 올라끝내는 그 업보로 교도소에 갇혀있으면서도 역사의 共業의 굴레를 벗지못하고 남을 탓하는 정치군인들과 비교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들과의 비교보다는 "진 솔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는 한마음으로 오직 참된 불자의 길을 걸어온 장군의 발자취에서 진짜 군인모습과진정한 보살의 모습을 찾게 된다.<글 朴亨鳳.사진 張容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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