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 4월4~7일 서울국제불교박람회서
최초 불교성전 허영호의 '불교성전' 등
근대 개화기 불서 원본 9종 전시 ‘화제’

근대 개화기 불서 원본 9종 초간본이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전시된다. 윗줄 왼쪽부터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귀원정종’, ‘각해일륜’, ‘극락 가는 길’. 아랫줄 왼쪽부터 ‘불교성전’,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 ‘신편 팔상록’,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봉은사 사진)’ 관련 사진.
근대 개화기 불서 원본 9종 초간본이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전시된다. 윗줄 왼쪽부터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귀원정종’, ‘각해일륜’, ‘극락 가는 길’. 아랫줄 왼쪽부터 ‘불교성전’,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 ‘신편 팔상록’,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봉은사 사진)’ 관련 사진.

전시되는 책 모두 ‘초판본’

도서출판 민족사(사장 윤창화)가 4월4일부터 7일까지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불서, 100년 전으로 가다’라는 테마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성전인 허영호의 <불교성전>을 비롯한 근대 개화기 불교도서 9종을 전시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책은 모두 초판본으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1913)과 <불교대전>(범어사, 1914), 백용성(1864~1940)의 <귀원정종> (중앙포교당, 1913)과 <각해일륜>(대각교당, 1930),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성전인 허영호(1900~1958)의 <불교성전>(해동역경원, 1936),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1929년), 신소천(1897~1978)의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사바도원, 1936), 안진호(1880~1965)의 <신편 팔상록>(만상회, 1942), 김적음(1900~1961)의 <극락 가는 길>(선학원, 1936) 등 초판 원본이다.

이 책들은 모두 민족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이며, 전시에서는 간단한 해설도 포함되어 있다. 민족사는 이 밖에도 여러 권의 근대 불서를 소장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의 부족으로 9권만 전시된다.


☞  다음은 민족사에서 제공한 자료.


● 전시 목록

① 한용운(1879~1944)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1913)
② 한용운(1879~1944) <불교대전>(범어사, 1914)
③ 백용성(1864~1940) <귀원정종>(중앙포교당, 1913)
④ 백용성(1864~1940) <각해일륜>(대각교당, 1930)
⑤ 김적음(1900~1961) <극락 가는 길>(선학원, 1936)
⑥ 허영호(1900~1958) <불교성전>(해동역경원, 1936)
⑦ 신소천(1897~1978)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사바도원, 1936)
⑧ 안진호(1880~1965) <신편 팔상록>(만상회, 1942)
⑨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조선불교중앙교무원, 1929).

● 근대 한국불교 출판의 역사

책은 글을 쓰는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독자 이 세 사람이 만들어 가는 지적(知的) 예술이다. 저자는 책 속에 자신이 탐구한 세계와 혼(魂)을 담고, 출판사는 정성 들여 그 혼집을 짓고, 독자는 그 혼집 속에서 새로운 삶을 찾게 된다. 책은 기대와 설렘 속에 탄생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출판사는 자신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지적 유산으로서 영원히 독자의 가슴에 남기를 바란다.

여기에 선정한 9권은 1910년대~1945년대까지 근대 개화기 불서, 불교출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적지 않은 책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明滅)했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독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책은 드물다. 아마도 붓다나 공자, 장자 같은 철인(哲人)들의 책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분들의 책이 불멸(不滅)의 지적 유산으로 존재하는 까닭은 불의(不義)보다는 의(義)를 존중했고, 사(邪)보다는 정(正)을, 악(惡)보다는 선(善)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근대 출판’이라고 하면 과거 목판에서 수작업으로 한 장 한 장 찍어 내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판방식인 연활자(鉛活字, 납활자)를 이용하여 다량 출판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이 기준에 의거한다면 이교담의 <팔상록>(1913.5),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5)과 <불교대전>(1914.4), 그리고 백용성스님의 <귀원정종>(1913.6),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1917),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 등이 효시에 속할 것이다.

● 각권 해설

① 만해 한용운(1879~1944)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1913)
▸신불교 운동의 개혁서, 한용운이 불교개혁을 위하여 1913년에 간행한 불교서
▸신국판 | 반양장 | 80여 쪽 | 순한문체 및 국한문 혼용체 | 1913년 | 불교서관 발행

조선불교유신론
조선불교유신론

비합리적인 것들, 낡은 것들을 일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維新〕’는 취지 아래 저술되었다.

이 책은 한말 근대 불교의 갖가지 비합리적인 승가제도와 의식, 법규, 사고(思考), 그리고 비사회적·비종교적인 교육, 문화, 수행 방법 등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불교개혁을 부르짖은 책이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도들의 낙후된 생각과 제도, 구습 등을 타파하지 않고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불교가 살 길은 오직 개혁(=維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선불교를 유신(維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해가 개혁해야 한다고 제시한 항목은 승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승려교육제도 개혁, 포교방법을 근대화, 불교중앙통제기구 설치, 승려 금혼제(禁婚制) 폐지 등 12가지다.

한용운은 전통은 지키되 낡은 것,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승단에서 볼 때 상전벽해 같은 혁신적인 제안이었다. 긍정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고 비판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찬반이 극과 극이었다.

비록 만해의 혁신적인 제안이 전폭적인 지지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조선불교유신론>은 근대 개화기 한국불교계와 사회에 커다란 화두를 던져준 사건이었다. 만일 그의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성공을 거두었다면, 이것은 한국불교사에서 새로운 장(章)을 여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이 출판된 것은 그의 나이 35세 때인 1913년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 이 책을 집필한 것은 32세 때인 1910년으로 불문에 입산한 지 만 6년 되던 해이다. 이 책을 탈고할 당시 한용운(1879~1944)은 ‘님의 침묵’의 산실인 인제 백담사에 있었다. 만해 한용운스님은 1944년 6월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자택)에서 입적했다. 그의 법구(法柩)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삶은 그대로 이류중행(異類中行, 중생 속을 걸어가다는 뜻)이었다.

*덧글: 이 책은 1913년 불교서관에서 발행되었는데,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권 478쪽 해제에는 회동서관에서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오기(誤記)임을 밝힌다.

② 한용운(1879~1944) <불교대전>(범어사, 1914)
▸한 권으로 읽는 불교 명언, 금언집, 재가불자를 위한 불교성전
▸문고판 | 양장 | 800쪽 | 1914년 4월 30일 | 범어사 발행

불교대전
불교대전

불전에는 수행자로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삶과 생활에 지침이 될 주옥같은 잠언이 많이 실려 있다. <아함경>에는 교훈적인 잠언이, <화엄경> 등 대승경전엔 철학적인 잠언이 실려 있다.

만해 한용운(1879.8~1944.6)의 <불교대전>은 고려대장경 속에 있는 많은 명구를 모두 발췌하여 주제별로 편찬하여 불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 속에서 성전(聖典)처럼 읽도록 만든 책이 이다.

이 책에 수록된 명구(名句)는 총 1741구(句)이며, 인용한 경전은 444종이다. <화엄경>·<법화경>·<열반경>·<반야경>·<법구경>·<아함경>·<대승기신론>·<사분율> 등 대·소승 경전과 율장, 논서 등 많은 불전에서 뽑았다. 이 책은 일반 불교인을 위한 불교 지침서인데, 이는 목차에 ‘가정(家庭)’이나 ‘사제(師弟)’, ‘타인(他人)’ 등의 항목이 주제로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하드커버 양장으로서 종이와 제책이 매우 고급이다. 표지 색은 적색과 청색 두 가지가 있으며, 책 위쪽엔 <성경>처럼 붉은 칠을 했다. 1914년대에 출판된 책으로서는 일반서를 통틀어서 가장 고급으로 만든 책일 것이다. 값도 두 가지였다. 특양장본은 1원10전이었고, 보통 양장본은 85전이었다.

이 책의 목차는 서품, 교리강령품, 불타품, 신앙품, 업연품, 자치품(自治品), 대치품(對治品), 포교품, 구경품(究竟品) 등 총 9장으로 분류했다.

본문은 국한문혼용체로서 이것을 조선식 한문체라는 뜻에서 당시 ‘선한문(鮮漢文)’체라고 했다. 발행처는 범어사이고 판매처는 조선선종 중앙포교당과 광학서포(廣學書舖, 광학서점)였다.

③ 백용성(1864~1940) <귀원정종>(중앙포교당, 1913)
▸주자학과 기독교의 불교 비판에 대한 반론서
▸국판 | 반양장 | 195쪽 | 순 한문 | 세로 조판 | 1913년 | 중앙포교당 발행

'귀원정종'
'귀원정종'

<귀원정종(歸源正宗)>은 불교에 대한 주자학과 기독교의 비판에 대한 반론서이다.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고승인 백용성(1864∼1940)의 저술로, ‘귀원정종(歸源正宗)’이란 ‘근원에 돌아가는 바른 가르침’이란 뜻이다. 바른 가르침이란 바로 불교를 말한다.

한문으로 쓰여 있으며, 1913년에 경성(京城, 근대 서울 이름, 서울이란 이름은 광복 후이다.)의 중앙포교당(中央布敎堂)에서 간행하였다. 책은 한 권이지만 편집체제는 상·하권으로 분류되어 있다.

백용성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주자학이 불교를 배척하고, 특히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와 천주교가 들어와 불교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불교는 일찍이 타종교를 비난한 적이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주자학과 기독교 등의 불교 비판에 대해 이 책을 저술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상권에서는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 30개 항목을 뽑아서 그 부당함을 주장했다. 주요 항목을 보면 주자학자들의 ‘불교도들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인륜을 섬기지 않는다는 비난(不事人道難)’에 대한 반론을 비롯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는 믿을 수 없다는 비난(因果難信難)’, ‘불교는 허무적멸의 가르침이라는 비난(虛無寂滅難)’ 등에 대한 반론들이다.

하권에서는 기독교(예수교: 耶蘇敎, 야소교, 참고: 예수교를 한자로 야소교라고 했음)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설 등에 대해 그들의 주장이 맞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은 평등과 자비의 정신이다(明佛之戒殺平等慈愛)’, ‘지옥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地獄原因不出唯心所作)’, ‘불보살(佛菩薩)의 수행 방법’ 등 총 34개의 항목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창조천지만물(創造天地萬物)’에서 천지창조설을 비판하여 “만일 하느님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인데, 그렇다면 누구나 다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창조할 것이지, 누구는 시종일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받게 만들었는가? 하느님의 능력은 이것뿐인가?”라고 매우 논리적, 합리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백용성스님
백용성스님

이 책의 편집은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 새로운 납활자로 만든 책)으로 1책이며, 간기(刊記, 판권)에는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 구불기 2940년, 서기 1913)年 六月十日 發行(발행)’이라고 되어 있다. 참고 세존 응화란 불기를 말하는데, 현재 불기(佛紀)는 1965년경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전은 구(舊)불기를 사용했음)

백용성(白龍城, 1864~1940)스님은 일생 가운데 상당 부분을 불서 간행을 통한 불교 포교에 매진했다. 또 경전 한글화에도 공헌했다. 그가 이렇게 헌신했던 것은 3·1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부터이다. 감옥에서 타 종교인들은 모두 한글로 된 성전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은 출옥하자마자 불교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선각자적인 안목이 아닐 수 없다.

④ 백용성(1864~1940) <각해일륜>(대각교당, 1930)
▸한글로 쓰인 최초의 불교 교리서, 입문서
▸신국판 | 1책 | 208쪽 | 1930년 | 대각교당 발행

'각해일륜'
'각해일륜'

근대의 독립운동가이자 고승이였던 백용성(白龍城, 白相奎/백상규)스님이 저술한 책으로, 대각교(大覺敎) 운동의 이념서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개념의 불교 입문서 교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글로 쓰였다는 점에서 백용성의 근대적 의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출간 이후 불교 개론서, 입문서, 수행의 지침서로서 널리 읽혀져 왔다.

백용성은 3·1 독립운동으로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를 때 타 종교인들이 한글로 된 성전을 읽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한글로 번역한 불서 간행을 통해 포교에 매진하고자 서원을 세웠다. 출소 후 삼장역회와 대각회를 설립하여 포교와 불서 간행에 헌신했다. 또 상해임시정부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는데, 임시 정부 대표 김구 선생은 1945년 12월12일 귀국 후 대각사를 방문하여 용성 스님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용성(龍城, 1864~1940)스님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정식 출가했다. 40세 이후 선회(禪會)를 개설해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했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 법호는 용성,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⑤ 김적음(1900~1961) <극락 가는 길>(선학원, 1936)
▸표지 디자인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불교 책
▸4*6판 | 반양장 | 1책 | 58쪽 | 1936년 | 선학원 발행

'극락가는길' 표지
'극락가는길' 표지

불교 책으로는 아주 이른 시기에 표지 디자인을 컬러로 처리한 책이다. 책 표지에 등장하는 바탕은 바다, 즉 도피안을 뜻하고, 배는 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을 뜻한다. 극락행 돛단배의 빨간색 돛이 매우 예쁘고 흥미를 끈다. 1936년도에 출판된 불교서적으로는 상당한 디자인 개념을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을 번역한 것인데, 발행처는 안국동 40번지 선학원이고, 발행자는 김적음스님, 번역자는 지일 선생(之一 先生, 권상로스님)이다.

본문 편집은 세로 편집, 순 한글인데, 특징은 명사는 한자를 괄호 처리했고, 인명, 지명 등 명사에는 세로로 선을 넣어서 구분했다는 것이다. 중국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대중들이 읽기 편하도록 배려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적음스님
김적음스님

김적음스님은 15세에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제산(霽山)스님. 1922년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선우공제회 총회에서 서무부 이사로 추대됐다. 1927년에는 직지사에서 사교과를 마쳤으며, 1930년에는 만공(滿空)스님에게 입실 건당했다. 이때 초부(草夫)라는 법호를 받았다. 1931년 선학원 상임포교사 소임을 맡았으며, 1934년 조선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를 거쳐, 선학원 3대. 5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계승하기 위해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했다. 같은 해 범행단(梵行團)을 결성해 청정 비구승단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되던 해 12월17일 서울 충무로 3가 50번지에 있는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47년 1월에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하고 역시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대한민주당과 한국국민당이 통합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0년 4월20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5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6월24일 정화운동발기인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이튿날 교단정화추진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955년 공주 마곡사 주지로 취임했고, 1956년 3월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년에 병고를 겪은 스님은 1961년 10월3일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61세, 법납 39세. 제자로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과 동국대 이사장, 공주 신원사 조실을 역임한 벽암(碧岩)스님이 있다.

⑥ 허영호(1900~1958) <불교성전>(해동역경원, 1936)
▸최초의 우리말 불교성전
▸변형 국판 | 1책 | 386쪽 | 1936년 9월 15일 | 해동역경원 발행

허영호 '불교성전'
허영호 '불교성전'

1936년에 출판된 허영호의 <불교성전(佛敎聖典)>은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우리말 불교성전이다. 그는 1930년부터는 <불교> 잡지에 기츠 무안(木津無庵, 1876~1943)의 <신역불교성전(新譯佛敎聖典)>을 번역하여 연재하였고, 그 원고를 바탕으로 출판된 것이다. 비록 번역이지만 근대 최초의 불교성전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불교성전(佛敎聖典)> 경남의 3 본사인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에서 설립한 해동역경원의 1차 목적 사업으로 출판된 책이다. 상권만 출판되고, 하권은 해동역경원이 문을 닫으면서 출판되지 못했다.

특징은 본문 368페이지 가운데 한자(漢字)는 단 한 글자도 없는 순 100% 한글이라는 점이다. 애시당초 한자는 넣지 않았다는 점은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당시 책으로는 띄어쓰기를 상당히 했는데, 일반서를 통틀어도 이 정도 띄어쓰기를 한 책은 드물다.

또 내용적으로도 대승불교 경전에서 뽑은 것이 아니고, 빠알리대장경에서 뽑았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물론 일어판 <신역불교성전(新譯佛敎聖典)>을 번역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매우 이른 시기에 우리나라에 빠알리경전이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명사 표기도 비록 우리말로 표기했지만, 빠알리 발음에 기준으로 했다는 것이다.

허영호
허영호

허영호(許永鎬, 1900~1952)는 범어사 출신으로, 법호는 경호(鏡湖), 아호는 현주(玄州), 허윤(許允)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허영호스님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유학한 적이 있는 지식층이자 불교학자였다. 불교대학인 다이쇼대학(大正大學)에서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1945년 9월 전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장을 지냈고, 그 후 혜화전문학교가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자 1948년 11월까지 동국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49년 1월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부산시 갑구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6월 선거에서 낙선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으로 가서 1952년 1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영호는 <불교> 잡지(1929~1933) 등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범파양어(梵巴兩語)의 발음법에서 본 조선어 발음법에 관한 일고찰’, ‘절(寺)의 어원에 대하여’, ‘조선불교 교육 제도의 결함과 개선’ 등은 매우 중요한 글이다.

⑦ 신소천(1897~1978)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사바도원, 1936)
▸경전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국판 | 반양장 | 290쪽 | 국한문 혼용 | 세로 조판 | 1936년 5월 29일 | 사바도원 발행

신소천 '금강반야바라밀경'
신소천 '금강반야바라밀경'

경전에 대한 주석서, 해설서는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서도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는 특히나 많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금강경>이 육조혜능 이후 중국 선종의 소의경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경전 자체가 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에 <금강반야경>에 대한 강의 및 해설서 가운데서도 전인미답의 강의서가 신소천(申素天, 韶天, 1897~1978)스님의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1936년)이다. 이 책은 앞 사람들의 학설이나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은 독창적인 강의로서, 당시로써는 학문적 성격에 가까운 강의이다. 특히 <금강경>의 공사상을 되살렸는데(즉 活空), 이처럼 새로운 강의, 해설서는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당시까지만 해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의였다. 한문투의 난해하고도 애매모호한 해석에서 벗어나 명확하고도 간결한 강의였다. 그 당시 어떻게 이와 같이 명쾌하고 분명하게 주석을 달았으며, 막힘없는 강의를 할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또 그는 <금강경> 독송과 탐구를 통하여 우리 민족과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 보고자 했다. 전국을 무대로 <금강경> 독송 운동을 전개하여 커다란 바람을 일으켰다. ‘금강경 강의’라고 하면, 신소천스님을 머리에 떠올릴 정도였는데, 말 그대로 <금강경>을 신봉, 신앙하고 생활화했다.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를 조직하여 <금강경> 독송 운동을 전개했고, 전국적으로 강의와 신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것을 학자들은 ‘공(空)을 살렸다’는 뜻에서 ‘활공사상(活空思想)’이라고 한다.

또한 신소천스님은 <금강경과 각(覺)운동>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속에는 ‘우리는 금닭이다. 금강경으로 울자’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금닭’이라는 노래와 ‘구국가’, ‘구세가’를 지어 운동을 자극하였다.

신소천스님은 원래 기독교 신자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세(1910) 때까지만 해도 교회를 다녔다.

신편팔상록
신편팔상록

⑧ 안진호(1880~1965) <신편 팔상록>(만상회, 1942)
▸대승불교권에 전해진 부처님 일대기
▸국판 | 549쪽 | 세로 조판 | 1942년 | 만상회 발행

안진호스님
안진호스님

지금은 부처님 생애에 관한 책이 많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은 오직 안진호(安震湖, 1880~1965)스님이 쓴 <신편 팔상록(八相錄)> 하나뿐이었다.

안진호스님의 <신편 팔상록>은 탄생에서 열반까지 시종 초인적이며 신이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역사적인 부처님보다는 사상적·철학적으로 위대한 불타상을 정립하여 불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신앙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 교리와 대승경전의 내용이 상당히 삽입되어 있어서 대승불교 입문서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책은 부처님 생애를 팔상도(八相圖), 팔상성도(八相成道)의 분류방식에 따라 8장으로 나누어져 있다.(8상은 도솔래의상·비람강생상·사문유관상·유성출가상·설산수도상·수하항마상·녹원전법상·쌍림열반상이다) 그리고 다시 8장을 176가지 이야기로 분류했는데, 비록 신화적이긴 하지만 문장이나 서술 방식이 매우 감동적이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삽화가 들어 있어서 그림만 보아도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가 있게 하였다. 즉 한 장의 삽화를 통하여 부처님 생애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은 안진호스님의 나이 63세 때에 쓴 만년의 노작이다. 1942년 10월10일 만상회(卍商會)에서 출판된 이후 70년까지 30년 동안 대중들에게 인기를 끈 불교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또한 사찰의 법보시 대상 1순위였으며, 만상회라는 출판사 겸 서점의 존재 가치를 널리 알렸던 책이었다.

참고로 부처님 일대기로 널리 알려진 ‘팔상록’은 안진호스님의 <신편 팔상록> 말고도, 1913년에 중앙포교당에서 간행된 이교담의 <팔상록>과 1922년 삼장역회에서 간행된 백용성스님의 <팔상록>이 있다. 한편 팔상록은 개인 필사본이 약 50종이나 있다. 말하자면 통속적인 소설의 하나가 되어 많은 사람이 베껴서 읽었던 것이다.

⑨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朝鮮寺刹三十一本山寫眞帖)>(조선불교중앙교무원, 1929)
▸100년 전 31본산의 모습,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4*6배판 | 양장 | 1929년 | 조선불교중앙교무원 발행

봉은사
봉은사

▸책 첫 장은 강남 봉은사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은 남북한으로 갈라져 25개 본사에 불과하지만, 그 이전에는 남북한 전체 31개 본산이 있었다. 이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은 1920년대 우리나라 31개 본산(본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첩이다. 이 사진첩은 1929년(소화 4년) 8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지금의 총무원 전신)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서문을 보면 조선총독부 종교과에서 본산의 주지와 협의하여 사진사를 파견해 촬영했다고 한다. 이 사진집은 필름이 나오기 전인 유리 건판(유리 원판)이다. 흑백 사진인데 지금 사진 못지않게 선명하고 구도와 명암 처리 등도 뛰어나다.

인쇄는 사진 인쇄 전문 업체인 교토(京都) 야마모토 고슈우(山本湖舟) 사진 공예부에서 했는데, 인쇄와 종이(무광아트지) 질도 매우 좋다. 제책(제본)과 표갑(表匣, 케이스)도 그 재질과 방식 등을 본다면 일본에서 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각 본산 사진마다 유산지를 1장씩 넣었고 간단한 역사가 인쇄되어 있는데, 100년 전에 이런 고도의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도 놀랍다. 이 31본산 사진집에 실린 본산은 순서대로 광주 봉은사(지금 삼성동 봉은사, 당시 경기 광주군), 수원 용주사, 양주 봉선사, 강화 전등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금산 보석사, 완주 위봉사,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 대구 동화사, 문경 김룡사, 경주 기림사,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부산 범어사, 황해도 해주 패엽사, 황주 성불사, 평양 영명사, 평원 법흥사, 영변 보현사, 고성 건봉사, 태백 유정사, 평창 월정사, 안변 석왕사, 함흥 귀주사다. 특히 북한 사찰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귀한 자료다.

일제는 1911년에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사찰을 30개 본산으로 나누어 전국의 말사 등을 관리했다. 그 후 1924년 전남 구례 화엄사가 본산으로 승격되어 31 본산이 되었다. 31 본산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다. 조선불교를 대표하던 이 본산들은 당시 수행도량으로 위용을 자랑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풍화와 전란과 화마 등으로 원형이 훼손되었고, 또 근래 신축이 이루어져 많은 사찰들이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다. 그러나 핵심 건물은 여전히 남아 있다. 평양 영명사는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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