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에도 집착하지 말고 나쁜 일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사진은 영축총림 통도사 석탑.장용준 기자 
좋은 일에도 집착하지 말고 나쁜 일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사진은 영축총림 통도사 석탑.장용준 기자 

제21화 나홀로

상독행상독보(常獨行常獨步) 
달자동유열반로(達者同遊涅槃路)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강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사방 칠보를 걸으시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치셨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의 모든 고통을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뜻인데, 오늘의 구절 역시 이와 유사한 내용입니다.

이 두 구절의 공통점은 “나 홀로”라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대단히 이기적인 말같이 들리는 것 같으나,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절에 들어가면 첫 관문이 일주문(一周門)입니다. 이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를 가리키는데, 세간은 분별(分別)의 세계입니다. 좋고 싫은 고락과, 옳고 그른 시비가 끊임없이 물고 물리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즉,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기는 인과(因果)의 세계로서, 아무리 좋은 것도 그 가운데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있고, 아무리 지옥 가운데 있을지라도,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이 두 마음이 시절 인연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 합니다.

그러나 출세간(出世間)이란, 이러한 오락가락하는 두가지 마음이 끊어져서 분별(分別)을 하지 않으므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모두가 사라진 중도(中道)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주문은 하나의 기둥으로서 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홀로”라는 의미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데, 분별심이 없으므로 좋고 나쁜 과보(果報)가 없고, 옳고 그른 과보(果報) 또한 없으니, 인과(因果)가 완전히 끊어져서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으며, 천상과 지옥도 없는 삼계(三界-욕계, 색계, 무색계)의 개고(皆苦-모두가괴로움)가 모두 사라진 중도(中道)의 경지로서, 여여(如如)하고 극도로 편안한 경계를 말합니다.

이를 증득(證得)하여 마음을 깨치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지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으니, 그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뜻은, 누구나 각자의 업(業)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그들의 업(業)따라 살아가고, 자식은 자식 스스로의 업(業)에 의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며 때로는 간섭하고 때로는 한 몸처럼 주고 받고 살아가고 있으나, 이 또한 어디까지나 각자의 업(業)에 의해 나로 하여금 상대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 또는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장 업(業)이 두터운 관계들입니다. 그러나 자식으로 하여금 죽을 것 같을 만큼의 정(情)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고락(苦樂) 업(業)이 자식으로 하여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나 부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의 고락(苦樂) 업(業)이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가장 극명히 서로가 서로에게 정(情)을 주고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의 고락(苦樂) 업(業)이 나타나는 때에 맞추어 부모나 부부, 자식에게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부모 대로의 고락(苦樂) 업(業)에 의해 자식이나 부모, 또는 부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보이나, 이는 각자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고락(苦樂) 업(業)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고운 정 미운 정으로 교감하는 것일 뿐, 각자가 자신의 업(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 있어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과(因果)의 도리입니다. 더 좋은 것은 더 나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고, 더 나쁜 것은 더 좋은 인과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일에 있어서는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여 성취하도록 하되,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서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별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단연코 마음을 깨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생기면 반대쪽의 하나가 생긴다 했으므로, 좋다라고 느끼는 순간 나쁘다라는 과보가 생기게 되는데, 이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더욱더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이치를 환하게 잘 안다 할지라도, 남의 일로 생각하다가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고 자신에게 일이 닥치게 되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깨어 점검해야 한다. 바로, 좋은 일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고, 나쁜 일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음이다.

오늘도 기도 참선 보시 정진으로 일일시호일이 되고자 노력해 봅니다.

 

제22화 앞날을 알아 맞추는 신묘한 방법

조고신청풍자고(調古神淸風自高) 
모췌골강인불고(貌悴骨剛人不顧)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로 드높음이여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

[강의]

조고(調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분별(分別) 망상(妄想)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自性) 불성(佛性)을 가리킨다. 무명(無明)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서, 마음을 깨쳐 한점의 괴로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신청(神淸)의 신(神)은 묘용(妙用)을 말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습이 그 자체로 군더더기 없이 지극히 깨끗하여 고락(苦樂)과 시비(是非) 분별(分別)이 없으므로 이를 신묘(神妙)한 모습이라 한다. 그리하여 누가 뭐라하건 그 어떤 것에도 끄달리거나 아쉬움이 없는 고로, 그 풍채(風采)를 스스로 드높이고 있음이다.

모췌골강(貌悴骨剛) 즉, 초췌한 모습과 앙상한 뼈는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나, 오욕(五慾-식욕, 수면욕, 재산욕, 명예욕, 성욕)으로 얼룩진 분별의 살들이 모두 빠져 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 가운데 앙상한 뼈만 남아있다는 것이니, 이는 본래자성(本來自性-나의 근본)이 금강석(金剛石)과 같이 단단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고 건실한 분별을 여읜 진여(眞如) 자성(自性)을 사람들은 결코 돌아보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 없다는 소회를 영각스님은 게송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불교의 목적은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즉 내가 곧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적이다. 부처는 전지전능하기도 하지만, 전지전능할 필요도 없는 것이 부처이고, 괴로움이 한점도 없는 자리를 말한다. 또 부처는 두 마음이 아닌 상태를 가리킨다. 한 마음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 한 마음은 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 마음이라 하므로, 틀린 것이다. 생각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교외별전(敎外別傳-가르침과 별개의 것)이다.

반면에 중생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좋은 마음, 편안한 마음,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그 하나요, 이러한 마음을 가지려 하는 것은 곧, 싫고 나쁜 마음, 불편한 마음,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좋건 싫건 어느 하나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와 반대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이 두 마음 중에 어느 하나만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고, 어린 시절이 있으면 늙은 시절이 자동으로 생기게 되고, 건강한 시절이 있으면 병든 시절이 있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좋은 시절이 있으면 반드시 좋지 않은 시절이 도래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가 생기면 다른 반대의 하나가 생긴다는 것을 까맣게 간과하고, 무조건 좋은 것, 즐거운 것, 행복한 것, 기쁜 것만 찾으려 하니, 찾으려 하거나 찾은 만큼, 싫고 나쁜 것, 괴로움과 불행한 것이 똑 같이 생기게 되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를 인과(因果)의 업보(業報)라고 하고 시절인연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즐거움을 찾고 재미있는 것을 찾으며, 좋은 것만 찾으려 하니,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미물중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수행자 공부(工夫)인은 스스로의 업(業)에 묶여서, 한없이 욕심을 내는 자신의 업장(業障)을 소멸시키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좋은 것, 즐거운 것, 기쁜 것, 행복한 것 모두를 버려야 싫고 나쁜 것, 괴로운 것, 슬픈 것, 불행한 것의 과보(果報)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누가 마다 하겠는가. 그러나 좋은 것 뒤에는 나쁘고 싫은 것의 과보(果報)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이나 사주를 많이 애용한다. 좀 더 좋은 것을 취하려 하는 요행심 때문이다. 그러나 점이나 사주를 보지 않아도 인과(因果)를 알면 스스로의 운명을 쉽게 점칠 수 있다. 좋은 것을 구한 만큼 나쁜 것이 다가오게 되어 있고, 기쁜 시절만큼 슬픈 시절이 오게 되어 있으며, 즐긴 만큼의 고통도 다가오게 되어 있다. 또한 언젠가는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하여 사라질 것임을 일백프로 명백하게 알아 맞출 수가 있다. 이보다 더 잘 알아 맞추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은, 돈과 명예, 지식과 권력을 가지면 가진만큼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과 괴로움의 인과(因果) 관계는 이와는 별개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누차 골백번 강조했듯이, 좋은 만큼 싫고 나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생기기 때문이니, 누가 더 즐기고 누가 더 행복했던 가에 따라, 딱 그만큼의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반드시 다가온다는 사실로서, 그러므로 겉으로 봐서는 속 터지는 마음을 죽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인과(因果)의 현상은 결과적으로 분별(分別)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분별심을 얼만큼 어떻게 생기지 않게 하느냐에 따라 깨달음과 성불(成佛)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척도가 된다 하겠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해야 하는 것은, 인과(因果)의 업(業)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자신의 두 마음을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극복하는 것이니, 지금 당장에라도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마음을 그대로 놓아 방하착(放下着)해야 한다.

이도 저도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부터 시작할 것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13호/2024년3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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