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평 시인
구지평 시인

세한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 영하 12도를 오르내리며 폭설이 이어지더니 한낮에는 평년기온을 회복한 듯한데 맵찬 냉기는 여전하다. 오랜만에 특별한 일이 없는 1월 마지막 휴일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천안 태조산 산행을 계획하고 집을 나선다. 천안에서 핫하다는 유량동 쪽에서 출발하려고 청송사 앞 공터에 주차하고 태조왕건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태조산은 930년 태조 왕건이 이곳에 올라 지세를 살피고 천안도독부를 설치하여 후삼국 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천안’이라는 지명도 군사를 양병하고 머물렀다고 해서 ‘천안(天安)’과 ‘태조산(太祖山)’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애기봉에 오르니 멀리 각원사의 ‘청동 아미타불 좌불상’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합장하여 치성을 드린다. 눈밭이 습기를 잔뜩 머금은 습설(濕雪)이라 위험하다 싶었지만 대머리바위 정상까지 목표를 잡고 오르는데 예상대로 만만치 않다. 중턱쯤 출렁다리에 다다르니 발아래 한창 공사 중이던 유량동과 안서동을 연결하는 도시계획도로가 개통되고 터널 입구가 보인다. 눈길보다는 새로 탄생한 도로와 대면하는 인사를 하고 싶다. 아내는 되짚어 내려가 차를 가져오라 하고 터널을 통과하여 안서동으로 걷는다. 표지판을 보니 11월에 개통했다고 하니 시멘트 냄새도 못 벗은 새내기라 기분이 상쾌하다.

북적이던 안서동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호황을 누리던 식당들이 휴일임에도 줄줄이 문을 닫았고 질퍽대는 눈길에 덧대어 표정들이 찌들어 보인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비감한 엘레지 하나쯤 흘러나올 것 같던 ‘이종환의 셀부르’ 주변 공터에 차를 세우고 각원사로 향한다. 연화지에서 203계단 무량공덕 계단을 오르려다가 눈길이 부담되어 호젓한 오르막길로 접어드니 쌓인 눈이 깨끗하다.

태조산 산허리에 넉넉하게 자리한 각원사는 최근인 1977년에 세워져 고찰과는 사뭇 다른 산뜻한 풍경이다. 녹아내리는 낙숫물 소리가 여기저기서 자글자글 낮은음자리로 이어지고 천불전에 풍경소리가 분주하다. 관음전을 지나 계단 위로 올라서면 목조건물로 지어진 대웅보전이 장엄한 위용으로 압도하고 있고 그 앞에는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단아한 소나무가 자상하다.

대웅전에 들어서니 의외로 외국인이 드문드문 불향을 드리고 있다. 대웅보전을 나와 왼쪽 계단을 오르면 각원사의 랜드마크인 청동대불 좌불상이 서녘을 지긋이 응시하며 속세를 지키고 있다. 애기봉에서 드린 소박한 치성이 좌불상을 도는 동안 진지하고 엄숙해진다. 부처님 시선을 좇아 넓은 마당을 지나 무량공덕 계단을 향하면서 살짝 아쉬운 생각! 눈 덮인 가장자리를 따라 동백이 있었으면, 제 혼자 녹아내리는 저 눈이 덜 외로울 텐데….

작심하지 않고 나선 산행이 이렇게 욕망도 없고 사사망념도 버리는 하루를 만들었으니 발길 따라 마음이 다다르는 그 끝에서 얻은, 부처님 가피를 듬뿍 받은 행복함이 한 해 동안 늘 이어지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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