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돈황 특별전 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왕오천축국전’을 반입하여
한 달간 전시한 바 있다

전문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내용을 깊이 연구
혜초스님이 순례한 길을 따라
순례할 것을 발원해 본다

최광식 논설위원ㆍ고려대 명예교수
최광식 논설위원ㆍ고려대 명예교수

실크로드가 문명사적으로 동서문화 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것이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이 바로 실크로드를 통해서였다. 불교는 간다라 지역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 지역의 오아시스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사실 중국의 실크로드 여행은 바로 서역의 석굴사원을 탐방하는 여행이라 하여도 무방하며, 그 중 대표적인 석굴은 돈황의 막고굴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의 조영 시기는 5세기 전반부터 원나라 시기까지 거의 1000여 년에 이른다. 여기에는 부처와 보살을 그린 불상화와 불경이나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그린 고사화, 불경의 내용을 그린 변상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그린 사적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제220굴에 그려진 유마경변상도의 조우관을 쓴 인물이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 벽화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인물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의 인물이 그 모티프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관계가 깊다.

돈황은 원나라 이후 오아시스로가 쇠락해지자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주목을 받는데, 그 이유는 장경동이라 불리는 막고굴의 제17굴에서 많은 양의 고서와 고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문서는 90% 이상이 불교 관련 내용으로, 한문 및 호탄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로 된 자료들과 비단과 마, 종이에 그린 불화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러 자료 중에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다. 이들 기록을 통해 혜초가 인도에서 돌아온 것이 727년이고, 이후 금강지와 불공에게 밀교를 배웠으며, 780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혜초의 인도 순례가 4~5년 걸렸을 것이라 보고, 중국을 출발했을 때 20세 전후라고 본다면, 그는 700년경에 신라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에 당나라에 건너갔다가 청년시절에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것으로 생각된다.

<왕오천축국전>은 전문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혜초가 어떠한 일정으로 다섯 천축국을 여행하였는지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일체경음의>에 인용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는 오늘날 베트남에 해당하는 ‘각멸(閣蔑)’,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나는 거북이나 자라의 껍질인 ‘대모(玳瑁)’가 인용되어 있어 혜초가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갔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혜초는 서역에서 쿠차를 거쳐 육로로 돈황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혜초는 갈 때는 해상 실크로드로, 올 때는 오아시스로로 순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고 있을 때 ‘실크로드와 돈황’ 특별전을 하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왕오천축국전>을 프랑스로부터 대여하여 국내에 반입하여 한 달간 전시한 바가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내용을 깊이 연구하고, 혜초스님이 순례한 길을 따라 순례할 것을 발원해 본다.

[불교신문 3810호/ 2024년 3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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