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폭격 방지 위한 묘책
‘팔만대장경 수호’에 크게 일조
자운스님 젊은 행자 피신 보호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 스님들이 팔만대장경을 폭격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장경각을 덮었다. 사진은 해인사 장경각. 불교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 스님들이 팔만대장경을 폭격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장경각을 덮었다. 사진은 해인사 장경각. 불교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 스님들이 민족문화유산이며 성보인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쳤던 사실이 주목받고 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후 남하해 가야산 해인사에 주둔한 북한군과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과 국군이 작전을 전개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대장경을 지키려고 스님들이 적극 나섰던 것이다.

해인총림 해인사 총무국장 진각스님은 불교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노스님들에게 전해 들은 한국전쟁 당시 일화를 전했다.

진각스님은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 빨치산 부대가 머물고 있어, 가야산에 폭격이 이뤄지면 대장경까지 소실(燒失)될 위험에 처해었다”면서 “큰절에 계시던 몇 분의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빨치산을 찾아가 ‘당신들이 이곳에 계속 머물면 비행기 폭격으로 대장경이 불탈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씀을 홍제암 종성스님에게 들었다”고 밝혔다. 해인사 스님들의 간곡한 청에 빨치산 부대는 가야산과 이어져 있는 김천 수도산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전쟁의 와중에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한 해인사 스님들의 또 다른 노력도 있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주도권을 장악해 전화(戰禍)를 모면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다름 아닌 밀가루 포대를 여러개 이어 붙인 대형 장막에 태극기를 그려 장경각을 덮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성보인 동시에 민족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성보인 동시에 민족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해인사 총무국장 진각스님은 “낮에 빨치산을 추적하려고 가야산 상공을 순회하는 아군 전투기가 폭격하지 못하도록 해인사 스님들이 지혜를 냈다는 이야기를 노스님들에게 들었다”면서 “선대 스님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전란의 와중에도 대장경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가 떨어져 저녁이 되면 장경각 위의 대형 태극기를 내려 숨겨야 했다. 밤에 내려오는 빨치산들이 태극기를 발견하면 곤욕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인 와우정사 해곡스님은 “자운스님이 빨치산에 강제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행자들을 장경각에 피신시켜 돌보았다”고 증언했다. 해곡스님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와우정사에서 정진한 해인사 광운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면서 “한국전쟁 때 광운스님이 해인사에서 행자로 있었는데 밤이 되면 또 다른 행자 1명과 같이 장경각에 피신하게 하고 음식을 대주었다”고 전했다. 병력(兵力)이 부족한 빨치산들이 젊은 스님이나 행자들을 발견하면 강제로 징집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시절이다.

자운(慈雲, 1911~1992)스님은 청정계율을 호지하며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고, 수많은 도제를 양성한 선지식이다. 자운스님을 평생 시봉한 전 포교원장 혜총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자운스님은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감로사 등으로 옮겨다니며 수행했다”면서 “젊은 행자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무고하게 희생당하지 않도록 한 큰스님의 일화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큰 교훈”이라고 회고했다.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 낙오된 북한군과 빨치산 900여 명이 가야산에서 아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해인사는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특히 1951년 9월 18일 토벌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해인사 안팎에 은신한 빨치산을 섬멸하기 위해 폭격을 요청했지만 당시 4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출격한 김영환 대령이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해인사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야산 능선 뒤의 성주 쪽 빨치산 주둔지를 포격하고 귀환해 팔만대장경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해인총림 해인사(주지 현응스님)은 김영환 대령 공적비를 건립한데 이어 매년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 해원과 상생을 위한 수륙대재'를 봉행하여 희생자들을 천도하고, 분단의 아픔 치유와 갈등 해소를 발원했다.

1951년 8월 항공작전 임무 수행 당시 고뇌의 결단을 한 김영환 대령과 더불어 해인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천년고찰과 팔만대장경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부산, 용인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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