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전생담’ 가르침 받은 ‘꿩의 보은’ 생명과 화합의 산이 되다

구룡사 국형사 입석사 상원사 영원사
의상대사 창건 신라말 무착선사 활약
한암 탄허 희찬스님 오대산 가풍 계승

비로봉 정상,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펼친 치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정상에는 꿈에서 현몽한 한 거사가 만든 돌탑 3기가 있으며 원주를 비롯 치악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비로봉 정상,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펼친 치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정상에는 꿈에서 현몽한 한 거사가 만든 돌탑 3기가 있으며 원주를 비롯 치악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보은의 산’ 치악산

치악산(雉岳山)은 강원도 원주 진산이며 국립공원 제16호로 지정된 명산이다. 유서 깊고 아름다운 절이 산을 더 빛낸다. 원래 이름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 하여 적악산(赤岳山)이었다. 남대봉 상원사(上院寺)에 전해오는 무착조사(無着祖師)와 구렁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은 꿩(雉)설화가 더해져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치악산은 ‘보은(報恩)의 산’이다.

치악산 기슭에 수행이 깊은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했다. 그 날 저녁 죽은 구렁이 아내가 사람으로 변해 스님을 유인했다. 여인은 자정이 되기 전에 폐사가 된 상원사 종을 세 번 울리게 하면 죽은 구렁이가 승천할 수 있으므로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산정까지 올라가 종을 칠 수 없어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데 종이 세 번 울렸다. 구렁이는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뜻이므로 다시는 원한을 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님이 있었던 곳은 숲에 싸인 자갈밭이었다. 먼동이 트고 상원사로 올라가 보니 종루 밑에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꿩이 죽음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하여 치악산으로 불렀다.

치악산은 하나다. 꿩과 구렁이의 전설, 창건주 의상대사와 중건주 무착조사, 궁예의 대권(大權) 야망,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 고대 뿐만 아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치악산은 같은 곳에서 나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다. 치악산에서 많은 봉우리가 솟고 그 아래 계곡과 아름다운 사찰을 품었듯이 치악산은 하나의 역사 하나의 불교다.

치악산은 강원도 원주와 영월군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이다. 등산객들 사이에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오른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높고 가파르다. 가장 높은 해발 1288m 비로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매화산(梅花山, 1084m), 삼봉(三峰, 1073m)이 펼쳐지고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 1043m) 남대봉(南臺峰, 1182m)으로 이어진다. 각 봉우리 마다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과 명찰이 있다.
 

치악산 안내도.
치악산 안내도.

오대산 가풍 잇는 치악산

북쪽에는 치악산을 대표하는 구룡사가 있으며 비로봉 아래 입석사, 향로봉 아래 조선시대 국가 차원 제사를 올리던 국형사, 남대봉에 꿩과 구렁이 전설을 간직하고 궁예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던 상원사와 영원사가 있다.

현대 역사는 오대산 월정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치악산의 절들은 모두 월정사 말사로 월정사와 역사를 같이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외호를 받았던 오대산 월정사는 막대한 토지와 산림을 바탕으로 불교 근대화에 앞장서고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 교구 본사 월정사는 대처승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유학한 엘리트가 운영하고, 상원사는 방한암스님을 중심으로 비구 선승들이 계율에 바탕을 둔 참선 수행 정진했다. 한암스님은 선종 총림 수행 전통을 ‘승가오칙’으로 정립해 제자들이 수행 지침으로 삼도록 했다. 

1950년대 후반 한국불교 정화로 월정사를 비구승이 운영하면서 상원사에서 시작된 ‘참선(參禪) 염불(念佛) 간경(看經) 의식(儀式) 수호가람(守護伽藍)’ 승가오칙은 오대산 수행가풍으로 정착했다.

6·25전쟁 후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존경받았던 탄허스님의 학문이 스님들은 물론 지식인들에게 전수되도록 상좌 희찬스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복원하는 한편, 승가오칙에 따라 제자를 길렀다. 희찬스님은 오대산에서 공부했던 대처승 인재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었다. 이들은 일본 유학을 한 불교계 최고의 인재들이며 일제시대 조계종 종무원장을 역임한 이종욱스님의 상좌들이었다.

희찬스님은 같은 교구 소속이면서 산(山)을 달리하는 치악산에 이 스님들이 머물도록 배려했다. 구룡사의 박종영스님, 국형사 전영호 장상열스님, 상원사 와운스님이다. 모두 일제 때 유학한 최고의 엘리트였다. 박종영스님은 공주사대 출신으로 김종필 총리와도 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10·27 법난은 월정사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암 탄허 만화스님으로 이어지는 오대산 법맥이 흔들릴 정도였다. 10·27 법난 후 종단이 인사 난맥상으로 혼란에 빠지고 공교롭게도 탄허스님과 만화스님이 잇따라 입적하자 월정사도 큰 혼란에 빠졌다. 바람은 치악산에도 불어닥쳐 희찬스님이 임명했던 이종욱스님 상좌들이 새로운 인물로 교체됐다. 치악산의 고승들은 학식이 깊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치악산 암자들을 새로 복원하는 공은 컸지만 급변하는 시대에 맞춘 신도교육, 지역포교, 사회복지 등을 맡기에는 힘에 부쳤다. 치악산에도 새로운 바람 새 인물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1980년대 젊은 비구승들이 맡았다. 새로운 젊은 엘리트 스님들에 의해 치악산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마침 1980년대부터 경제개발로 인한 관광 바람이 불면서 강원도에도 활기가 돌았다. 문화재에 대한 정부 관심도 높아져 접근이 어려웠던 치악산 암자에 길이 놓이고 가람도 달라졌다. 월정사 출신 젊은 스님들의 수십년에 걸친 노력에 큰 몫을 했다.
 

치악산 사찰을 대표하는 구룡사.
치악산 사찰을 대표하는 구룡사.

치악산 불교 대표 구룡사

치악산 대표 사찰은 구룡사다. 치악산 북쪽에 자리한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 66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668년은 의상대사가 소백산에 부석사를 세울 때다. 구룡사 뿐만 아니라 반대편 상원사를 비롯 영원사 국형사도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는 치악산과 원주 지역의 지리적 전략적 위상과 관련 있다.

원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도권을 놓고 싸우던 한반도 중부 요충지다. 치악산은 충청에서 서울로 강원도로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다. 치악산 아래 한강이 흐르고 그 옆에 너른 들이 펼쳐진, 풍요로운 고장이다. 신라는 원주 일원을 북원경(北原京)이라 하여 북방 수도에 버금가는 위상을 부여했다.

의상도 이처럼 중요한 원주와 치악산을 찾았을 것이다. 그 흔적이 치악산 사찰 역사에 스며있다. 산 봉우리 이름도 치악산이 의상의 화엄불교를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가장 높은 봉우리 비로봉은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을 뜻한다. 오대산 소백산 등 많은 사찰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비로봉을 붙였다. 법신 비로자나불은 모든 불보살의 근원이며 상징이다.

현재 구룡사 가람은 1706년(숙종32)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연호가 적힌 와당이 출토됐다. 전쟁으로 무너진 구룡사를 일군 스님은 1960년대 박종영(宗泳)스님이었다. 1966년 보광루를 해체 복원한데 이어 심검당과 요사, 삼성각, 대웅전을 보수 단청했다. 

어렵고 험한 시절을 거쳐 1980년대 이후 한암 탄허 희찬스님으로 이어지는 오대산 가풍을 계승한 월정사 스님들이 치악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가람을 중수하고 전법을 펼치며 원주불교계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치악산의 중심인 구룡사는 원로의원 원행스님의 역할이 컸다. 스님은 원주에서 처음으로 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어린이 청소년 수련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포교 문화 정법 수호에 큰 역할을 했다. 원행스님 뒤를 이어 적천스님도 오랫동안 주석하며 화재로 불탄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람을 일신했다.

구룡사에는 창건 당시와 조선시대 억불로 인해 사찰이 퇴색했을 무렵의 설화 둘이 전해온다. 창건당시 설화는 의상과 아홉 용에 얽힌 내용이다. 지금 대웅전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용들과 도술 시합을 벌여 용을 쫓아냈다. 여덟 마리는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계곡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이 구룡사(九龍寺)다. 조선 시대 설화는 아홉 구(九)가 거북 귀(龜)로 바뀐 연유에 관한 내용이다. 절이 풍요해지기를 바라는 구룡사 스님들이 거북의 혈맥을 끊는 바람에 오히려 절이 쇠락해져 절 이름에 ‘거북 귀’를 붙였다는 설화다. 스님들 탐욕이 아니라 불교를 탄압한 유학자들이 절이 쇠락한 원인인데 이를 가리려는 ‘거짓뉴스’다.
 

비로봉 아래 자리한 입석사, 입석대가 보인다.
비로봉 아래 자리한 입석사, 입석대가 보인다.

치악산 최정상 비로봉 불탑

구룡사는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로 유명하다. 비로봉에서 떨어지는 세렴폭포는 천하일경으로 수많은 관광객 등산객들이 찾는다. 가파른 돌계단으로 된 사다리병창 길을 따로 오르면 치악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이다. 비로봉 정상에는 세기의 탑이 우뚝 서 있다.

원주에서 과자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일명, 용진수)씨가 비로봉 정상에 3년 안에 3기의 돌탑을 쌓으라는 꿈을 꾼 뒤 혼자 탑을 쌓기 시작했다. 1962년 9월에 시작해 1964년 5층으로 된 돌탑을 모두 쌓았으나 1967년과 1972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져 복원했다. 1974년 용씨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1994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치악산국립공원 사무소가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미륵불탑 중 남쪽 탑은 ‘용왕탑’ 중앙은 ‘산신탑’ 사다리병창길에서 올라오는 입구에 홀로 있는 북쪽 탑을 ‘칠성탑’ 이라고 한다. 탑을 쌓은 용창중씨는 1974년 작고했으며 탑은 비로봉 명물로 남았다.

비로봉에 서면 원주 시내와 남으로 펼쳐진 치악산 줄기, 그 너머 충북 강원도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로봉에서 세렴폭포 방향으로 내려가 남으로 향하면 향로봉 남대봉으로 이어진다. 향로봉을 가기 전 돌계단을 내려가면 입석사가 나온다. 절 옆에 직사각형 모양의 큰 돌이 서 있어 입석사(立石寺)다. 입석사 역시 구룡사와 다른 치악산 사찰처럼 의상대사가 토굴을 짓고 수도한 데서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 입석사는 현재 자리에서 남쪽 50m 지점 속칭 신선바위 아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옛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강원도 엿으로 유명한 황골(黃谷)에 자리한 입석사(立石寺)는 가파른 돌 길이지만 비로봉 까지 올라가는 최단 거리인데다 원주 시내와 가까워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절 옆에 높이 50m 절벽 위에 20m 높이의 네모꼴 바위 입석대(立石臺)가 있고 그 앞에는 석탑 부재를 모아 만든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입석사 석탑(立石寺 石塔)이 서있다. 길을 더 들어가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흥양리 마애불좌상을 만난다.

입석사는 현대 원주불교를 일으킨 성불원 현각스님의 발심처로 유명하다. 오늘날 원주불교가 성불원과 현각스님으로 인해 크게 일어났으며 그 첫 인연처가 입석사이니 치악산 현대불교사에서 이 절이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다.

입석사에서 다시 치악산으로 올라가 향로봉으로 가면 그 아래 유명한 사찰 두 곳이 나온다. 보문사와 국형사다. 보문사와 국형사는 처음에는 보문암(普門庵)으로 불렸다. 향로봉 옆 봉우리를 관음봉이라 한데서 보듯 관세음보살 주석처로 삼았다. 보문을 사람들은 ‘고문’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보문사를 ‘웃고문’으로 부르고 그 아래 국형사를 ‘아랫고문’으로 부른다. 보문사는 현재 태고종 소속이며 국형사는 월정사 말사다. 보문사가 태고종 소속으로 남은 것은 원주 불교계 큰 어른이었던 강상준스님과의 인연 때문이다.
 

국형사 전경.
국형사 전경.

국태민안 동악제 국형사

보문사가 국형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시대다. 국형사(國亨寺) 이름에서 보듯 조선시대 국가 차원에서 재를 올리던 사찰이다. 조선은 전국의 유명한 다섯을 신성한 산으로 여겨 오악(五岳)이라 부르며 제를 올렸다. 치악산은 동악(東岳)이었다. 그 제를 국형사 옆 동악단에서 지냈다. 전쟁으로 폐허가 돼 동악제를 구룡사가 대신하다 사찰이 제 모습을 갖추면서 다시 가져왔다. 국형사와 보문암도 신라 경순왕 대 무착조사(無着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국형사는 약수로도 유명하다. 조선 2대 정종의 둘째 희희공주가 폐병이 들어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국형사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 공주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동악의 신령이다. 네가 정성껏 기도하는 것이 갸륵하니, 곧 너의 병이 나을 것이’ 고 한 뒤 100일 기도 후 병이 나았다. 정종은 딸의 쾌유에 기뻐하여 절을 크게 짓고 산신을 모시는 동악단에서 봄, 가을로 호국대제(護國大祭)를 지내게 하였다는 것이다.

국형사 동악단 주변 송림(松林)도 예사롭지 않다. 소나무 숲과 국형사의 기운이 수행자에게는 득도를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치유를 준다. 이 숲을 지켜낸 것은 국형사 스님들이다. 전쟁 이후 벌목이 기승을 부려 국형사 주변 숲도 위기에 처했다. 희찬스님이 보낸 전영호스님은 도끼를 들고 다니며 벌목을 막았다고 한다.

1980년 석우스님이 무애당(無碍堂)과 관음전을 건립하는 등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가람을 회복하다 2002년 부임한 선혜스님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희찬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선혜스님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을 정비하고 대중들과 함께 운력하며 오늘날 국형사를 일궜다.
 

아름다운 금대 계곡에 위치한 영원사.
아름다운 금대 계곡에 위치한 영원사.

아름다운 금대 계곡 영원사

비로봉 다음으로 높은 남대봉 아래 두 사찰 상원사와 영원사는 궁예의 흔적이 남아있다. 상원사에 서면 치악산 너머 온 치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펼쳐진다. 이 높은 곳에 절이 들어선 것이 신기할 정도다.

치악산 상원사도 무착스님이 창건했다. 상원사는 “무착스님조사께서 당나라에서 수도 후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대성께 기도 하시고 관법으로 치악산 정상에 성지를 발견하여 창건하셨고 도선국사께서 삼층보탑을 조성하시었다. 이후 고려국사 나옹화상의 이십성상의 하발을 위시하여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 축념 등 역대 고명 선덕조사께서 하발하시던 도량이며 이조 역대 국왕들께서 춘추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명승 고찰이다”라고 소개한다.

꿩이 목숨을 바쳐 구했다는 설화를 화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박형진 전(前) 원주문화원장은 “원래 적악산을 보은의 꿩에 얽힌 불교설화에 따라 치악산으로 호칭한 것은 인과응보를 강조하고 삼한화합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상원사 아래 석남사에서 군대를 일으켜 삼한통일의 꿈을 펼친 궁예가 인근 고을을 침범하면서도 피 흘리지 않고 섭수한 것은 상원사에 서려 있는 상생 화합 원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주인들은 남북과 동서를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치악산과 원주는 한반도의 통합과 화합의 땅이라고 자부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원사를 본격 중창 복원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1966년 혜원스님과 대행스님이 중창하였고 1984년 경덕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24년간 주석하면서 불사해 신검당, 대웅전, 심우당, 산신각, 종각, 독성각, 일주문, 통신. 전기공사, 주방, 범종을 주조하여 현 도량을 중흥했다. 그리고 현 주지 고공스님이 15년간 주석하면서 오늘의 가람으로 만들었다.

지금 상원사는 석축을 쌓아 많은 공간을 확보했다. 석축이 만든 땅에는 각종 채소를 재배하고 있으며 대웅전 옆으로 공간을 확보했다. 현재는 신림면 일대에 이르는 상원사 땅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박스 기사 참조)

상원사 아래 400m 즈음 한마음선원을 창건한 대행스님이 주석하며 수행했던 견성암 터가 있다. 스님은 1960년대 상원사에서 수행하여 이 곳과 인연이 깊다. 스님을 따르는 스님 신도들이 견성암 터에 세운 비가 있다.

상원사 화장실을 지나 남대봉으로 가다보면 오래된 부도 한 기가 나오며 무착조사가 중국에서 묘목을 얻어와 심었다는 계수나무 네 그루가 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영원산성과 산성을 수호하기 위해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영원사가 나온다. 영원산성은 궁예가 근거지로 삼았다는 곳이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영원사를 오늘날 가람으로 혁신한 분은 무이스님이다. 3km를 걸어야 겨우 닿는 치악산 깊숙한 암자였던 터라 월정사의 여러 스님들이 부임했지만 얼마 못 있고 떠날 정도로 힘들었다. 1970년대 희찬스님을 모시고 월정사에서 수행했던 무이스님이 20여년에 걸쳐 불사를 해 지금은 아름답고 맑은 금대골의 명찰로 거듭났다.

상원사 영원사 주변 신림은 원주와 제천을 잇는 교통 요충지이며 깊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수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는다. 특히 상원사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상원사에 서면 치악산 일대의 아름다운 광경이 한 눈에 들어와 많은 사랑을 받는다. 상원사는 돌계단을 거쳐 2km 넘게 걸어간다. 절에 필요한 쌀 부식 등 생필품도 모두 지고 날라야한다.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상원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상원사 꿩의 보은은 부처님 ‘전생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스토리 전개는 다르지만 골격은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살려주고 굶주리는 매에게는 당신 목숨을 주었다는 전생담과 닮았다.

무착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땅을 차지 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경책하기 위해 생명 만큼 소중한 가치가 없음을 전생담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치악산이 전하는 가르침인지 모른다.
 

목숨으로 은혜를 갚은 꿩과 무착조사 이야기를 담았으며 국내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원사.
목숨으로 은혜를 갚은 꿩과 무착조사 이야기를 담았으며 국내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원사.

원주=박부영 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 원주 치악산 현대불교 이끈 성불원과 현각스님

6·25전쟁과 정화 후 치악산은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법천사 거돈사 등 4대 사지를 거느린 고려시대 최고 번성기를 누렸던 원주불교는 변화에 뒤처졌다.

상황은 1980년대 이후 달라졌다. 치악산 입석사에서 발심하여 월정사 희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해인사 강원, 동국대 종비생 출신의 엘리트 현각스님이 원주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1985년 전직 승려라고 주장하는 한 목사가 전국을 다니며 불교를 비방했다. 이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 청년들이 이를 규탄하며 연합법회를 개최했다. 원주도 상지대불교학생회를 중심으로 모임이 생기고 법회가 열렸다. 그 이름이 성불회였다. 현각스님이 젊은 학생도 불교 수호를 위해 나서는데 월정사 스님으로서 두고 볼 수 없다며 법사로 나섰다.

그 힘이 현대 원주불교를 일으킨 기반이 되었다. 스님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이듬해 성불원을 개원했다.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 유아교육, 복지 세 가지 원력을 세웠다. 유치원을 개원하고 1991년 원주복지원 부랑 노숙자시설을 위탁 운영하고 임대 아파트 단지에 세운 명륜복지관을 맡았다. 지금은 다문화센터, 어린이집 등 사회복지시설 13개 분야에 사회복지법인 성불복지원 600여명 직원, 270억원 가량 보조금 사용할 정도로 성장했다.

스님은 “몇 년 사이가 아닌 꾸준히 기반을 구축하면서 축적된 힘으로 하나 하나씩 나아간다”고 말했다. 치악산 불교도 1990년대부터 함께 되살아 났다. 

 

상원사의 장엄한 일출.
상원사의 장엄한 일출.

◼ 상원사의 아픔

“일제가 뺏은 상원사 땅 돌려 받아야”

상원사는 그 아래 신림면까지 넓은 땅을 갖고 있었지만 일제시대 강제로 변경된 뒤 해방 후에 돌려주지 않으면서 많은 땅을 잃게됐다. 상원사는 일제가 앗아간 그 땅을 돌려받기 위해 나섰다. 상원사 주지 고공스님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를 옮긴다.

“상원사는 1300년을 이어 신림을 지키고 원주시를 지키며 조선 오백년 동안에는 국태민안을 위하여 기도하던 절입니다. 일제 전에는 상원사의 땅이 신림면에 서 주천으로 넘어가고 성남리로 들어오던 곳까지 상원사 땅이었다고 합니다.

일제 때 5만9500평을 제외한 땅을 빼앗아 갔으며 상원사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바위 위에 쇠 말뚝을 박았다 합니다. 이렇게 일제는 땅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쇠말뚝을 박으며 산의 정기를 훼손 시키자 하였습니다. 일제가 끝나고 1971년 시청에 몇몇 사람이 모여 조합을 만들고 원성군에 있는 땅들을 원성군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상원사 땅 역시 5만9500평을 둘러싼 땅을 원성군 땅 으로 등록하였으며 상원사 만이 아닌 원성군에 있는 많은 땅 들을 원성군으로 등록하였습니다.

상원사로부터 남대봉으로 300m 밖에 몇백년 되는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는 스님들이 돌아 가시면 화장하고 난 뒤 뼈를 묻고 돌로서 스님의 무덤이라는 표시입니다. 스님의 무덤조차도 원주시의 땅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부도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원주시 땅이라고 주장하며 상원사로 부터 400m 아래에는 견성암이라는 곳이 있으며 1960년경에 대행스님이 수행하며 계속 관리를 해오던 곳이 있으며 남대봉 가는 길에 잣나무 심어 놓은 곳이 있는데 상원사에서 감자를 심어 먹던 곳입니다.

일제를 겪으면서 힘에 의해 땅을 빼앗겼으며 이제는 원주시에 땅을 빼앗겨 맹지가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원주시가 바른 행정을 하여 시민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에서 1300년을 관리하던 해발 1100 고지의 땅을 원주시의 땅이라 등록한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합니다. 정기가 훼손되는지 절에 이런 아픔이 있는지 일제와 똑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으며 증거가 없으며 원주시에서 등록했으니 원주시 땅이라 주장하고 있는 원주시입니다.

절이 그냥 절로서만 있는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기도 하고 원주시를 위해 기도하며 많은 분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이며 좋아도 찾고 나빠도 찾으며 1300년을 원주시민과 같이 살아오던 곳입니다. 원주시에서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산의 정기를 살리고 절에서 더욱 많은 분들을 위해 기도 할수 있도록 땅을 돌려 주었으면 합니다.”

[불교신문3686호/2021년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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