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을 위해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경주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대사의 진영.불교신문
경주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대사의 진영. ⓒ불교신문

➲ 회통(會通)의 대가

원효(元曉, 617~686)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원효는 전날 밤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해골에 담긴 사실을 알고 구역질을 한다. 똑같은 물인데도 어제는 시원함을, 오늘은 구토를 느낀 것이다. 내 마음에 따라 대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낸 셈이다. 

원효의 이야기가 실감 있게 다가온 적이 있다. 오래 전 어느 여름 복날로 기억된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복달임을 한다며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다른 이들은 보신탕을 시키고 나만 다른 음식을 주문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나무에 묶어놓고 개를 잡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특히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있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대 내장 비슷한 음식이 나오기에 서비스라 생각하고 먹어보았다. 무척 맛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일행들은 ‘개고기를 못 먹는다면서 잘도 먹네!’ 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개고기를 처음 먹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 음식이 개고기 수육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먹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 역시 아무리 목이 말랐더라도 해골에 담긴 물을 보았다면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와 나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대 내장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수육에서 수저를 내려놓았지만, 그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음식을 향한 나의 편견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음식을 즐긴 것은 아니지만, 나의 편견만은 버릴 수 있었다. 원효의 지적대로 “마음이 생기므로 모든 것이 생겼던 것이다(心生則種種法生).”

이처럼 같은 대상이나 사건을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바라보는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내 안에서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로 확대하면 얼마나 많겠는가. 특히 오늘처럼 진영 논리에 빠져 모든 것을 해석하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원효 당시에도 종파 간의 갈등이 무척 심각했다. 그들의 쟁론(爭論)이 ‘강과 바다’를 이룰 정도였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의 충돌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만은 지양해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원수’가 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원효는 ‘어떻게 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위한 논리를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개합종요(開合宗要)다.

개인적으로 원효를 공부하면서 감탄했던 부분이다. 그는 이 논리를 통해 종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높은 차원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원효는 불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일심(一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니까 붓다 가르침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일심이 되는 것이다. 그는 각 종파에서 중시하는 소의경전을 일심의 펼침(開)이며, 이것들을 다시 모으면(合) 일심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화엄종이나 법상종과 같은 종파 또한 일심을 펼친(宗) 것이며, 다시 요약(要)하면 일심과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일심에 즉(卽)한 개합종요의 원리인 것이다.

이 원리를 물과 얼음, 수증기에 비유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펼칠(開) 수 있다. 여름날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얼려야 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끓여야 한다. 건조한 방안의 습도를 위해서는 수증기가 필요하다. 물과 얼음, 수증기는 모습이 다르지만 이것들을 모으면(合) 다시 물로 돌아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H2O라는 동일한 본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심 또한 물과 같아서 사람들의 성향이나 필요에 따라 화엄이나 유식 등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었다. 그는 분명한 자기 철학과 논리를 갖춘 회통(會通)의 대가였다.

흔히 원효를 화쟁국사(和諍國師)라 부르는데, 이는 고려 숙종 때 내린 시호(諡號)다. 한국 회통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인물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가 특별히 남긴 열반송은 찾아볼 수 없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그의 삶을 기록하면서 ‘원효불기(元曉不羈)’, 즉 원효는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였다. 서구식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묘비명이라 생각해서 소개한다.

“각승으로 처음 삼매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 바람에 걸렸네. 달 밝은 요석궁 봄날의 꿈은 지나가고,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 텅 비었네(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 중생을 향하여

원효를 이야기할 때마다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석공주(瑤石公主)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설총(薛聰)이다. 설총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며,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그는 불지촌(佛地村), 오늘날 경북 경산군 자인면(慈仁面)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사라나무를 지나다가 산기를 느껴 그 아래에서 원효를 낳았다고 전한다. 어쩐지 석가모니 붓다의 탄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태어난 곳도 붓다의 마을(佛地村)이 아니던가. 아마 원효가 붓다처럼 위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와 유사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원효는 승속(僧俗)을 넘어선 위대한 인물이라는 긍정적인 평이 많지만, 그저 파계하고 환속한 속인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그렇다면 일연은 원효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원효불기(元曉不羈)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원효가 승속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無碍)의 삶을 살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삶의 지향점은 언제나 높은 곳이 아니라 헐벗고 가난한 대중들이 살고 있는 낮은 곳이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下化衆生)’ 대승의 이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 모습이 ‘각승으로 처음 삼매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 바람에 걸렸네.’라는 구절에 녹아있다.

여기에서 각승(角乘)은 원효를 가리킨다. 그 유명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지을 때 소의 두 뿔 위에 붓과 벼루를 올려놓고 완성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또는 두 뿔을 깨달음의 바탕인 본각(本覺)과 수행을 통해 드러내는 시각(始覺)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원효가 깨친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효는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깨침을 향하는 삶에서 깨침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호롱박을 들고 춤을 추면서 중생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깨친 진리를 고요한 산속에서 즐긴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와 대중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역사가 원효를 위대하게 평가하는 이유다.

법당 벽면에 많이 그려진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入鄽垂手)다. 선(禪)의 최고 경지가 시장에 들어가 사람들과 막걸리 한잔 나누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는 때로는 거지들과 함께 생활을 했으며, 술집 작부들의 애환을 들어주면서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불교에서 깨침을 중시하는 이유가 보살행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중생을 향한 바람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요석공주에게도 닿았다. 이를 파계라 할지 몰라도, 그에게 승과 속의 구분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한 여성을 구제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이 걸친 옷마저도 거침없이 벗어던진 인물이 바로 원효였다. 어느 봄날의 꿈이라 생각했던 이에게 시비를 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어느 날 설총이 분황사를 찾아 소상 옆에서 절을 올리자 소상이 설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설총은 어느 봄날의 꿈으로 원효와 맺어진 인연이다. 분황사를 찾은 일연의 눈에는 아들을 향한 그림자마저 공(空)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원효는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면 모두 그르고 일심으로 소통하면 옳다고 보았다.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그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지역적으로 동과 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 종교적으로 불교와 기독교, 생태적으로 인간과 자연 등 소통해야 할 대상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에서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 원효의 화쟁론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 셈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는 소통철학에는 공멸을 공생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가 일심으로 돌아가라(還歸一心)고 강조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모든 중생을 위한(利益衆生) 길이기 때문이다. 그 명제는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신문3683호/2021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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