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조각의 진수…한국 最古 스님 조각상”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화엄학 대가ㆍ해인사 중창주
다른 스님 수행 돕기 위해
가슴에 구멍 뚫은 ‘흉혈국인’

앞 건칠, 뒤쪽 나무로 제작
원형 변형 없이 잘 간직돼
고려시대 초기 초상 조각
실체 알려주는 귀중한 성보

생존했던 고승 그대로 재현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 주목

국보 제333호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고려시대, 높이 82㎝).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개국 1100년 기념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 당시 진품의 정면과 측면 모습.
국보 제333호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고려시대, 높이 82㎝).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개국 1100년 기념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 당시 진품의 정면과 측면 모습.

 

청정도량 해인사!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법보(法寶) 사찰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인삼매는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된다. 거친 파도 같은 우리들의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를 뜻하는 해인사는 우리 마음의 안식처이며 긍지를 갖게 하는 곳이다. 해인사는 창건 이후 조성된 수많은 성보문화재로 가득 찬 보물창고로 이곳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성보가 있는 곳으로, 그 귀중한 성보가 바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海印寺乾漆希朗大師坐像)’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실제 생존했던 스님의 진영 조각상이다. 건칠(乾漆)은 삼베와 종이 등에 옻을 바르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여 몇 겹으로 올리면서 상(像)의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이 2020년 보물에서 국보 제333호로 승격됐다.

 

화엄종을 크게 일으키다


희랑대사는 10세기 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했던 스님으로 화엄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 스님의 조각상이 고려 초에 해인사에 봉안된 후 현재까지 이르게 된 그 배경부터 먼저 살펴보자.


희랑대사는 889년(진성여왕3년)에 태어나 15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949년 이전에 열반했다고 전해진다. <균여전>에 의하면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화엄학의 대가가 있었는데 관혜(觀惠)와 희랑이다. 그들은 나중에 남북으로 갈라져 관혜는 남쪽서 견훤의 복전(福田) 되고, 희랑은 북에서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되어 각기 화엄의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관혜의 법문을 남악파(南岳派)라 하고 희랑의 법계를 북악파(北岳派)라 한다”고 전한다.


이처럼 희랑대사는 고려 태조의 건국을 도왔던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다. 왕실의 비호를 배경으로 하는 희랑대사에 의해 해인사는 확장되고 새로워졌을 만큼 극히 융성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은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렀다. 최치원은 희랑대사를 유명한 용수보살이나 문수보살에 비유하기도 하고, 부처님까지 비견하고 있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 보아 대사는 900년경을 전후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여 화엄종을 크게 떨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스승 존승사상으로 조성


스님의 초상(肖像, 眞影)을 사찰에 봉안하는 전통은 약 5세기 이전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 일본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많이 제작됐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았다. 또한 그림으로 그린 진영탱들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고승의 진영을 모시는 것은 불교가 가장 대중화되었던 고려시대에 매우 활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선종사상이 유행했던 나말여초는 스님에 대한 존승사상이 매우 높았던 시절이다. 남아 있는 이 시대의 승탑이나 비를 보면, 부처님과 비등할 정도로 상당한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의 진영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증표로, 스승의 은혜를 늘 생각하게 하는 대상으로 매우 많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희랑대사상’은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고려시대의 조각품으로 전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희랑대사상’은 언제 조성된 것일까.

 

가슴에 구멍 있는 희랑대사상


희랑대사상은 덕이 높은 스님이 조용히 산사에 앉아서 정진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크기(높이 82㎝) 또한 실제 스님이 앉아 계신 듯한 모습이다. 불거진 마디가 드러난 두 손을 마주 잡고 앉아 있다. 머리는 매끈하며 얼굴은 길다. 이마에는 스님의 연륜을 나타내는 깊은 주름살을 표현했지만 쌍꺼풀이 있는 작은 눈에서 나오는 눈빛이 형형하다. 큰 코는 우뚝 서 있는 반면, 자연스럽게 번져가는 듯한 눈가와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두드러지게 표현한 광대뼈 또한 인상적이다. 삼각형으로 흐르는 긴 턱선은 개성 있는 얼굴과 함께 비범한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다.


목은 긴 편인데, 불거진 앙상한 뼈가 강인함을 보여준다. 여윈 몸 위로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황색의 동심원 형태의 점문이 있는 장삼을 입었다. 그 위에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있다. 가사에는 녹색의 띠를 엇갈리게 표현했다. 이는 많은 천을 기워 만든 분소의(糞掃衣, 탐심을 없애고자 헌 천의 조각조각을 기워 모아서 만든 가사)를 표현한 것이다. 왼쪽 어깨 위에는 가사를 고정하는 띠 매듭이 장식되어 있다. 가사의 아래로는 금색이 일부 남아 있다. 원래 도금하였으나,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채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희랑대사상 가슴에는 폭 0.5cm, 길이 3.5cm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로 인해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 불리기도 한다. 설화에 의하면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하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은 대개 신통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희랑대사상은 스님의 노년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마 입적하기 얼마 전의 모습을 조성한 것으로, 스님의 열반 전후인 10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은 원래 진영각이나 조사당 등에 모셔졌을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 문헌 기록을 통해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되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건칠과 나무를 조합하다


희랑대사상은 한동안 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오면서 일부 훼손이 심하여 2008년 보존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서 제작한 것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불교 조각에서 ‘건칠’로 조성된 상들은 대부분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희랑대사상은 한국조각사에서 건칠로 만든 초기의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칠로 만든 상은 비교적 가볍고, 상의 내부에 공간이 넓은 편이다. 희랑대사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신체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얼굴의 생생한 표정과 살갗을 사실적으로 나티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제작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좋은 옻칠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드는 단점이 있다. 이 상은 앞쪽은 건칠, 뒤쪽은 나무로 조성했다. 건칠로 상을 조성하는 기법이 발전하기 전에 약한 등 부위는 나무로 만들어 안정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후대에도 변형되지 않고,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희랑대사는 고려 태조의 스승이자 해인사의 중창주로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고승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예술적으로 그 가치가 뛰어난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한국의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희랑대사상은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보존처리 이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신 전시와 참배용으로 희랑조사상을 복원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해인사에 다녀 온 지 몇 해가 지났다. 또 다른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희랑대사상을 다시 친견하고 지혜를 구하고 싶다. 희랑스님의 수행처였던 희랑대(希郞臺)라고 하는 암자가 지금도 해인사에 남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안과 지혜를 주는 형형한 눈빛이 다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불교신문3664호/2021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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