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는 노여워하는 일이 없다”


논자 對 논자, 현자 對 현자 문답
밀린다왕 ‘대등한 위치’ 토론 수용
가치관 전환, 인식전환 토대 마련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드디어 대론을 통해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만한 수행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말한다. “존자여! 나와 다시 대론하시겠습니까?”, “대왕이시여!, 만일 현자(賢者)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왕으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현자와 왕의 대론은 어떻게 다른지 존자에게 묻자, 먼저 현자와의 대론에 대해 말한다. “대왕이시여! 대체로 현자의 대론에 있어서는 해명이 이루어지고, 해설이 이루어지고, 비판이 이루어지고, 수정이 이루어지고, 구별이 이루어지고, 세세한 구별이 이루어지지만 현자는 그것 때문에 노여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현자는 실로 이와 같이 대론합니다.” 또 왕과의 대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시여! 실로 모든 왕은 대론에 있어서 한 가지 일만을 주장합니다. 만일 그 일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에게 벌을 주어라’하여 그 사람에 대하여 처벌을 명령합니다. 모든 왕은 이와 같이 대론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대론을 앞두고 나가세나존자는 대화를 성립시키는 근거를 정하게 되는데, 현자 대 현자의 대화를 요청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대론은 문답으로 상대의 인식을 바꾸어 주는 방식이다. 밀린다왕은 그리스계 왕으로 인도의 기존철학과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종교관이 굉장히 낯설었을 것이며 아무리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하더라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서양 철학에 기반을 둔 가치관과는 사뭇 다른 불교관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세나존자는 논자 대 논자, 현자 대 현자의 대등한 위치에서 밀린다왕의 가치관을 교정시켜 주고 인식을 전환해 주는 철학적 문제 등에 대한 토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현자들의 대론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우리는 일상생활을 공유할 때 대부분 대화로 소통하게 된다. 대화는 상대방과 더불어 나의 감정, 의견, 생각 등을 교환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대화로 서로의 진의를 교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좋아한다’든지, ‘싫어한다’든지, ‘맛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이러한 표현은 상태를 단적으로 한정하지만 그 정도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특히 감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함께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인관계를 이어 나가는데 있어 대화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여기서 벌어지는 생각의 차이, 정도의 차이는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관계, 지위의 고하, 나이의 차이까지 투영되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말이란 것은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한다 해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만약 우리가 대화로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자 한다면 사람 대 사람으로, 되도록이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모바일 톡이다. 여기에는 건조한 텍스트만 있을 뿐 느낌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이모티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도 상대가 ‘~이 좋습디다 ㅋㅋ’라는 문자를 보내 와서 무척 기분 상했던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좋습니다 ㅋㅋ’의 오타였다. 우리는 말에 참 잘 속는다.

 

[불교신문3664호/2021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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