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곳에 글씨도 부처도 있다

 

좌선법과 서도는 같은 점이 많다. 우선 말이 입 밖에 내지 말아야하며 호흡이 빠르거나 더딘 것도 맞지 않으며 한결 같아야 한다. 선(線) 또한 가로는 가로로 세로는 세로로 더함도 뺌도 없는 그대로 직관이며 관조이다. 오고감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불이(不二)를 서예 작업으로 옮겨 거래(去來)불이필법이라 스스로 명명했다.


서도에서 점, 선, 획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같다. 한 생각 잘못하면 점은 살아나지 않고, 선은 기운을 잃어버리며, 획은 고압선 전류처럼 뜨겁지도 않고 진흙에 쳐 박히는 뾰족한 바위 같은 기세가 없어진다.


머뭇거리면 필세는 사라지고 조작만이 붙어 돼지 똥 싸놓은 듯 쟁기로 논밭 갈아 엎어놓은 듯 뒤죽박죽 썩은 냄새만 풍긴다. 뜻이 먼저요 붓은 마음형상을 따르는 일일뿐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에 글씨도 부처도 있다. 부처를 만나는 일이나, 글씨를 쓰는 일이나, 깊은 몰입과 사색과 교학적 접근과 명상을 통하여 자연의 묘미, 이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천형으로부터 받은 업장을 한 겹 한 겹 없애는 일이며 수처작주하여 입처개진 하는 것이다. 예술의 품격이 자취에 있지 않고 뜻에 있고 공부한다는 것은 스승의 뜻을 배우는 것이지 쓸데없는 자취를 밟지 말라 하였거늘 스승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할 수 있는 취모검(吹毛劒)같은 예리한 정신으로 다가서야한다. 이시대의 부처를 원하는 것이지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구차한 말씀보다 한 말씀이 더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현실이다. 이 시대에 난삽함은 어르신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모심의 대상이 없지는 않지만 어쩐지 조금은 찾아뵙기 쉽지 않다.


신라 김생사(金生寺)의 김생, 탄연, 경허, 탄허, 경봉, 홍경큰스님의 살아있는 붓글씨의 혼이 면면히 불교와 서예가 둘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현판과 주련의 품격은 사찰의 격을 한층 심화시키는 마지막 장엄 절정인데 관심을 크게 가져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함이 무척 아쉽다.


서예와 선(禪)은 둘이 아니다. 서예와 선은 하나이다. 좌복을 정리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나에 대한 고마움이다. 내려놓을 것 다 내려놓아야 본래 “자기다음”으로 갈 수 있다. 시절인연에 맡기지 말고 거꾸로 자신을 매달아야만 한다. 헛 부처와 헛꽃 잡고 웃지 않게 될 것이며 형상과 모방 아닌 한 생명이 간절히 나의 자유와 자재함이 일생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나 일 뿐 또 다른 내가 없다. 나의 글씨는 나에게는 위대함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아무런 기억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별로 개의치 않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새벽이다.

 

[불교신문3663호/2021년4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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