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격동 100년] <3> 일제강점기 고성 옥천사
[한국불교 격동 100년] <3> 일제강점기 고성 옥천사
  • 이성수 기자
  • 승인 2021.04.07 15:56
  • 호수 36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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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교육사업 통해 민족의 진로 모색

젊은 스님들 독립운동 가담 
불교진흥회 창립 전법 매진
의숙 야학 학원 등 설립해
​​​​​​​인재 양성 교육 불사 실천
일제강점기 고성 옥천사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극락전 앞에 한 스님이 서 있다.
일제강점기 고성 옥천사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극락전 앞에 한 스님이 서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한 후 한국불교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산중(山中)에서 벗어나 도심포교당을 건설하는 한편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산사(山寺)는 물론 도회지와 마을에 신학교를 건립하고 경성, 일본, 중국 등 국내외에 유학승을 파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운동에 참여해 구국의 깃발을 들기도 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사찰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경남 고성 옥천사이다.

옥천사는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고성과 진주 등 인근 도시에 거주하는 신도들과 지역 유지들이 참여한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를 창립하는 등 제국주의 시대 한국불교의 돌파구를 모색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인재 양성을 통해 조국과 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통적인 승가교육기관 외에도 광명의숙(光明義塾), 부인야학(婦人夜學), 진명학원(振明學院) 등을 세우는 등 교육불사에 힘을 쏟았다.
 

1932년 6월 제자들과 함께한 서응스님(가운데). ‘연화학우회 기념촬영’이라 적혀 있다.
1932년 6월 제자들과 함께한 서응스님(가운데). ‘연화학우회 기념촬영’이라 적혀 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1911년 사찰령 반포를 계기로 일제는 전국 사찰을 30본산(本山)으로 편성하여 관리에 들어갔다. 이 때 옥천사는 사격(寺格)을 갖추고 있었지만, 일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대중의 뜻에 따라 본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지금은 쌍계총림 쌍계사 말사이지만, 그 당시는 (영축총림) 통도사 말사로 귀속되었다. 이 때문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스님들이 통도사 교육기관에 진학하거나, 이후 또 다른 통도사 말사(포교당)에서 활동하게 된다. 본산 지정 이후 초대 주지는 서응스님, 2대 주지는 경봉스님이 맡았다.

두 스님은 인재양성을 위해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이 무렵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은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본말사의 젊은 스님들을 해외에 유학 보내며 힘을 보탰다.

일제강점기 옥천사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중생구제의 원력을 실천하는 출가수행자로서의 사명과 내외전을 익힌 지식인으로 제국주의 타파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박민오(朴珉悟), 신화수(申華秀), 박문성(朴汶星), 이종천(李鍾天) 스님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민오 스님은 3·1운동 참여후 백초월(白初月) 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비밀항일단체인 ‘혁신단(革新團)에 참여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 발행을 주도했다. 일경에 의해 수배가 내려 중국 상해로 몸을 피한 후, 배를 타고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에 도착했다. 1920년 8월 뉴욕항에 도착후 고학을 하면서 미네소타대(1927)와 하버드대 대학원(1932)을 졸업했다.
 

일제말기인 1944년 옥천사에서 열린 ‘마을연맹연성회’ 기념사진.
일제말기인 1944년 옥천사에서 열린 ‘마을연맹연성회’ 기념사진.

역시 옥천사에서 출가한 신화수 스님은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다. 이보다 앞서 1920년 친일파 암살 사건과 조선총독인 사이코 마코토 저격 모의에 가담하여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종천 스님은 일본 조동종 제일중학교와 동양대 윤리철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1920년 1월 통도사가 발행한 한국 최초의 사찰잡지 <축산보림> 발간을 주도하면서 민족의식과 불교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법명은 춘성(春城)이다. 옥천사가 설립한 진주 진명학원 교원으로 교육에 참여하고, 울산에서도 지역순회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월에는 만해스님이 총재로 추대된 조선불교청년회의 총무를 맡아 불교개혁에 앞장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28년 10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교> 제54호에 실린 ‘고 춘성 이종천군(君)의 추도문’에 따르면 당시 불교계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오호 고재(苦哉)라 군(君)이여, 회자정리(會者定離)하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이 무상(無常)의 대도(大道)이어니 조만(早晩)은 잇슬지언정 그 누가 사문(死門)을 면(免) 할손가. 그러나 군의 전정(前程)이 요원하고 우리 교계(敎界)일이 태산 갓거늘 요원한 정전을 여지 업시 버리고 중차대한 교계 일에 치명상을 주고 가니 군을 위하여 가석(可惜)하고 교계를 위하야 통석(痛惜)한지라”

해방 후에는 부산대학교에
토지와 전답 15만평 기증

옥천사는 지난 3월3일 개막한 ‘현대 역사사진전’을 6월 30일까지 열고 있다. 장소는 경내에 있는 옥천사성보박물관. 이번 사진전에는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중과 함께한 옥천사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옥천사 주지 종성스님은 “오랜 시간 앨범 속에 고이 간직되어 오던 근현대기 옥천사 사진들이 시절인연을 만나 여러분 앞에 공개되었다”면서 “이번 전시는 암울했던 근현대기 옥천사 불사를 주도하며 정법을 지켜오신 대표적인 큰스님 네 분과 옥천사 근현대 역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사진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옥천사성보박물관장 원명스님은 “암흑과 희망이 교차한 근현대기 옥천사가 걸어온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근현대 큰스님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사진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옥천사는 1923년 결성한 불교진흥회를 통해 포교활동에 적극 나섰다. 1923년 1월14일자 동아일보에 창립기사가 실렸다. 불교진흥회는 옥천사와 더불어 1924년 진명학원을 서립해 운영했는데, 1925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보통과와 고등과 2학급에 학생 78명이 재학하고 교원 3명이 재직하고 있었다.

특히 해외유학생을 다수 파견했는데, 당시 언론과 1948년에 발간한 <옥천사 교적부(敎籍簿)> 등 각종 자료에 따르면 옥천사 출신 유학생은 모두 20명으로 확인된다. 이는 옥천사 스님들의 교육열과 유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찰 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밝힌 부인야학(1925)외에도 자명유치원(慈明幼稚園)을 설립해 유아교육에도 힘썼다. 1935년 6월28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자명유치원 폐쇄’ 기사를 통해 그 이전까지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1945년에 옥천사 토지 13만 평, 전답 2만 평을 부산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1954년 옥천학원(玉泉學園)을 설립했다.

안경식 부산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성 옥천사에 보관되어 있는 ‘재단법인 옥천학원 설립허가 신청서’를 근거로 “이 서류는 한국 불교계가 담당한 근현대 교육적 역할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 현대 사료 가운데 하나이면서 옥천사의 지역 교육운동을 밝힐 수 있는 문건”이라고 의미를 부였다.
 

불교정화 후 초대 주지 취임 기념사진. 1955년 촬영한 것이다.
불교정화 후 초대 주지 취임 기념사진. 1955년 촬영한 것이다.

또한 안경식 교수는 “근현대기의 옥천사의 인재양성에 대한 자료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서 ‘신청서’에 게재된 취지서를 통해 옥천사의 교육사업 의지를 설명했다. 취지서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고등학교 시설로 말하면 도시 중심으로 다소 완비되었다고 하나 불행하게도 산간벽지에 처한 농촌의 청소년들을 지리적 경제적 조건으로 도시 진출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현하(現下) 아국(我國) 농촌 교육의 교육실태인 것이다. … 향학심에 불타는 진학할 학생을 위시하여 지방민의 절규와 성의에 호응하여 유지 경영에 기본 재산이 확립되었기 기설(旣設)된 고등공민학교를 승격하여 우선 초급중학교를 설립하고 동학교 유지 경영 재원의 확립에 완벽을 도모하는 동시에 국가의 문교(文敎) 시설에 만분지일이라고 보전코저 함.”

국내 외 유학승 다수 파견
지역주민 지원사업도 펼쳐

이밖에도 옥천사는 주민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옥천사 토지를 소작하는 농민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상호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매년 1차례 농사개량품평회를 열어 성적이 우수한 소작농에게는 농기를 상으로 전달했다. 또한 1927년 진주 등 경남지역에 수십 년 만에 가뭄이 발생했을 때 주민들의 요청으로 기우제를 지내 는 등 지역 사회와 유대를 공공히 했다.

옥천사 주지 종성스님은 “일제강점기에 경남 일대 애국지사들이 항일운동을 도모한 거점이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투신한 전통을 옥천사는 간직하고 있다”면서 “광복 후에도 불교 포교와 교육사업에 앞장서며 많은 인재를 양성한 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에도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도록 수행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이천운 경남지사장 woon3166@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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