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사성제를 대표적 해탈지견으로 정립하다

청정 여실지견 일어나는 동안
지혜 궁극적 지식 깨달음 반야
발생하는 지적 체험뿐 아니라
눈ㆍ빛 발생 시각적 체험 수반

붓다의 정각은 흔들림이 없고
태어남의 원인인 후유도 없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심해탈’

부처님은 녹야원(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12가지 측면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며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한다. 사진은 초전법륜지 인도 사르나트 유적지에서 발굴된 ‘아쇼카왕 석주’ 윗부분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네 마리 사자상 모형(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 엠블렘)으로, 지폐 문양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은 녹야원(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12가지 측면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며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한다. 사진은 초전법륜지 인도 사르나트 유적지에서 발굴된 ‘아쇼카왕 석주’ 윗부분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네 마리 사자상 모형(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 엠블렘)으로, 지폐 문양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반야(prajñā)를 통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되는 구조이다. 여기에서 반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의미한다. 수행자가 반야를 통해 진리에 대해 여실지견할 때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번뇌들이 제거되어 해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도에서 붓다의 정각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하는데,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승보살도와연계하여이것을‘아뇩다라삼막삼보리(anuttarāsamyaksambodhi)’라는 음역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의 초기나 부파불교 전통에서 무상정등정각은 오직 석가모니 붓다의 깨달음에만 부여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 계열의 대승 불전에서 보살도로서 무상정등정각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소위 하열한 수레를 통한 아라한의 불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석가모니 붓다와 동일한 완전한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는 우회적 표현이 될 수 있다.

12가지 측면으로 여실지견
초전법륜에서 붓다는 12가지 측면으로 사성제를 여실지견했기 때문에 최고로 올바른 완전한 깨달음, 즉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한다. 이를테면 붓다의 정각은 무상정등정각이고, 그 체험의 근거는 3번 굴린 사성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성제의 12가지 측면으로서 ‘삼전십이행상’은 석가모니 붓다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붓다들도 여실지견해야 할 보편적 진리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지난 호에서 소개했다.


붓다의 정각 체험의 일환으로 서술된 삼전십이행상과 첫 제자인 교진여의 법안 성취는 초전법륜의 모든 판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더라도 이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정각 체험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아니다. 초전법륜 이외의 여러 초기 불전에서 붓다의 정각 기술은 적어도 13가지 이상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전법륜의 내용에 주목하는 것은 다른 텍스트들과 달리 붓다의 정각 체험에 대한 술회가 제자들의 해탈 체험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재생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해탈지견으로서 사성제가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역에서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 혹은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相)’이라 축약한 사성제의 12가지 측면은 고성제 등의 네 가지 진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3번 굴린 형태이다. 첫 번째 굴림(一轉)은 “①이것은 고성제이다, ②이것은 고집성제이다, ③이것은 고멸성제이다, ④이것은 고멸도성제이다”라고, 사성제를 진리 그 자체로 발견한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굴림(二轉)과 세 번째 굴림(三轉)은 초월적 지혜로써 고성제인 여덟 가지 고통은 앎(知)의 측면으로, 고집성제인 갈애는 끊음(斷)의 측면으로, 고멸성제인 갈애의 완전한 소멸은 증득(證)의 측면으로, 고멸도성제인 팔정도는 수습(修)의 측면으로 각 진리에 상응하는 통찰 내용이 함께 배대되어 있다.


또한 그 서술어를, 두 번째 굴림에서는 미래수동분사로, 세 번째 굴림에서는 과거수동분사로 사용하고 있다. 즉 시간적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굴림은 “나에게 초월적 지혜로써 ⑤그 고성제는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이다, ⑥그 고집성제는 끊어야 할 것이다, ⑦그 고멸성제는 증득해야 할 것이다, ⑧그 고멸도성제는 수습해야 할 것이다”라고, 미래의 어떤 붓다가 여실지견해야 할 진리로서 사성제를 발견할 것이다.


세 번째 굴림(三轉)은 “나에게 초월적 지혜로써 ⑨그 고성제는 완전히 알려졌다, ⑩그 고집성제는 끊어졌다, ⑪그 고멸성제는 증득되었다. ⑫그 고멸도성제는 수습되었다”라고, 현재의 붓다인 석가모니를 위시한 과거의 붓다들이 여실지견한 진리로서 사성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현재의 붓다들이 발견했던 진리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붓다들이 앞으로 발견할 진리로서 사성제를 정립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성제는 삼세(三世)의 모든 붓다가 해탈지견하는 궁극적 지식이 된다. 이를테면 현재의 붓다뿐만 아니라 미래의 누군가가 12가지 측면의 사성제를 여실지견한다면 석가모니 붓다처럼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을 것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붓다 정각은 제자들에게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해탈지견으로 정립한 것이다.


한편, 팔리어 전승에서 사성제를 굴리는 방식은 위의 설명과 차이가 있다. 위에서 설해진 것은 사성제 전체를 한 카테고리로 묶고, 그것을 기준으로 통찰 내용과 시간을 배대한 후에 3번 굴려서 12가지 측면을 만든 것이다. 이와 달리 SN 56.11에서는 “이것은 고성제이다, 이 고성제라는 것은 완전히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 고성제가 완전히 알려졌다”는 방식으로 각 진리마다 3번 굴려서 ①-⑤-⑨(고성제), ②-⑥-⑩(고집성제), ③-⑦-⑪(고멸성제), ④-⑧-⑫(고멸도성제)의 순서로 12가지 측면을 나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각 진리에 대응하는 시간과 통찰 내용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체험을 그대로 설명하지 않았나
초전법륜에서 붓다의 정각 기술은 이와 같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과 각 진리에 대응하는 앎 등의 통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생생한 체험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이론이 내재된 체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붓다는 생생한 체험을 그대로 설명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율장 판본들에만 나타나는 아지비카(혹은 사명외도)와의 대화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 대화에서 붓다는 아지비카에게 자신의 정각 체험을 설명하지만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옆길로 가버린다. 이 사건은 5비구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붓다는 자신의 정각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면 체험 그 자체를 전달하기보다 이해하기 쉬운 적절한 내용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만큼 사성제가 해탈 체험에 있어서 결코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붓다의 정각은 기존에 있었던 길을 답습한 것이 아닌, 중도라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것이다. 즉 이 길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결과를 출발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착안하여 붓다는 사성제를 삼전십이행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론적 차원만 고려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생한 정각 체험의 내용임을 명백히 밝히는 “이전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 다르마들에 대해 여리작의(如理作意)할 때, 눈(眼)이 일어나고, 지혜(智)·궁극적 지식(明)·깨달음(覺)이 일어났다”는 후렴구가 12가지 측면마다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여리작의의 대상인 ‘이전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 다르마들’이란 12가지 측면의 사성제라는 교법이다. 또한 ‘눈·지혜·궁극적 지식·깨달음이 일어났다’는 것은 팔리어 전승의 축약 부분을 참조할 경우 ‘매우 청청한 여실지견이 일어났다’는 내용에 대응한다.

이 표현은 체험자의 입장에서 진리 체험의 순간을 그 진리에 대해 눈 등이 일어났다고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청정한 여실지견이 일어나는 동안 지혜·궁극적 지식·깨달음·반야(paññā)가 발생하는 지적 체험뿐만 아니라 눈·빛(āloka)이 일어나는 시각적 체험도 수반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와 같이 3번 굴린, (즉) 12가지 측면을 지닌 이 사성제들에 대해 눈이 일어나고, 지혜·궁극적 지식·깨달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천신·마라·범천을 포함한 세계로부터 사문·바라문·신·인간들을 포함한 존재들 가운데 해탈·출리·분리·원리되었고 전도로부터 벗어난 마음으로 널리 선언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흔들림 없는 심해탈’
위의 ‘붓다의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의 깨달음은 최고로 올바른 완전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인 무상정등정각이다. 그리고 여실지견을 통해 깨달은 진리는 3번 굴린(三轉), 12가지 측면(行相)을 지닌 사성제이다. 이 진리들에 대해 눈 등이 일어났기 때문에 혹은 매우 청정한 여실지견이 있었기 때문에 천신·마라·범천을 포함한 이 세간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 불가한 최고의 정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확신하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팔리어 전승에 따르면 “‘나의 심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후유(punabbhava)는 없다’라는 지견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즉 붓다의 정각은 흔들림이 없는 심해탈이고, 태어남의 원인인 후유가 없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무상정등정각에 대한 술회를 듣는 동안 5비구 중에 교진여(Koṇḍinya)에게 최초로 먼지가 없고 더러움을 여읜 법안이 일어난다. 그 순간 땅의 신에서부터 범중천의 신들까지 큰 소리로 초전법륜의 성공을 외치면서 축하하는데, 그 메시지가 범천의 세계까지 가득 울려 퍼지는 찰나, 일만 세계가 심하게 흔들리고 신들의 신성한 위력을 뛰어넘은 무량하고 고귀한 빛이 나타난다.
 

[불교신문3654호/2021년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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