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은 깨달음 얻기 위한 첫 항해

모두가 불성 갖추고 있어도 ‘원력’ 세우고
발심 수행해야 열반 경지 체득할 수 있어

양관스님

 

예불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오기 전의 찐한 어둠이 고요한 산사를 가득 덮고 있다. 그러나 새벽의 밝은 해가 저 동쪽에서부터 떠오를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진한 어둠을 견딜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밝음과 희망을 선사했던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은 우리들에게 짧음 속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발심에 관한 이야기는 불교를 접하다 보면 참 많이 듣는 이야기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니 하는 말들을 듣고 외우면서 정작 ‘발심’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어떤 스님이나 책에서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하는 것 이것을 수행으로만 알고 열심히만 하고 있다. 

저 역시도 출가하여 이렇게 살고 있지만 발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주지를 사는 요즘은 그냥 빠짐없이 예불을 착실히 드리는 것이 수행이 아닌가 하고 내가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발심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첫째, 불도(佛道)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이고 둘째, 불도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차치하더라도 깨달음을 불도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전에도 발심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등장해서 우리가 수행으로 나아가게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깨달음의 큰 결과를 얻기 위한 우리의 첫 항해를 말한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수보리가 “어떻게 머물러야하고 어떻게 수행해야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합니까?”하고 묻고 있다. 즉 주(住), 수(修), 항복(降伏)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전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는 말이 앞에 등장함으로써 발심이 먼저 인 것을 알 수 있다. 발심이 먼저인 것이다. 큰 마음을 먼저 발(發)해야만 수행을 통해 마음이 머무르고 항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문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華嚴經)>에도 발심에 대해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재동자가 매번 선우(善友)를 만나 청하기를 “나는 이미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으나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본스님의 <벽암록>에 연등회요에 전하는 마곡보철스님의 이야기에서 발심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마곡보철(寶徹)선사가 부채를 사용하자 어떤 스님이 “바람의 성품(風性)은 항상 움직이며 모든 곳에 두루 있는데 부채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대는 바람의 성품이 두루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바람 그 자체를 모르는구나”라고 했다. 그러자 “바람이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한 질문에 마곡스님은 잠자코 부채를 부쳤다고 한다. 

바람이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부채질을 하지 않으면 바람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불성(佛性)을 구족하고 있지만 원력을 세우고 발심 수행해야 보리 열반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더위를 식히려 부채질 하듯 열심히 우리 성품에 두루한 선한 마음을 일으켜 나가야 하리라 본다.

[불교신문3645호/2021년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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