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게 크고 무서운 것들
어느 사이 평범해지고 쉬워져

혜인스님
혜인스님

돌아보면 참 많이도 변했다. 생각도 나이도 생활도 외모도 환경도 소지품도 습관도, 태도와 가치관도 말투와 목소리도 다 변했다. 하지만 변해온 것들보다 아직 더 변해야 할 것들이 많아 보이는 건 변하고 싶은 그 마음이 아직 변함없기 때문이다.

변하고자 하는 마음마저 변코자 하면 계속 변덕만 커지게 될 테니, 변함없고 싶은 마음을 내는 순간 변함없던 그 마음마저 변해버리고 마는, 그래서 더 이상 변해야 할 것도 변함없어야 할 것도 없어지게 되는, 무슨 마음이든 이렇게 덜어지게 되는, 그런 변화가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변화였던가 싶다.

과거엔 왜 그리 고민이 많았었는지 언제나 덜어지고 난 후에야 알게 된다. 요즘엔 잠을 못 자서 고민이라는 분께 “왜 꼭 자려고 해요? 안 자면 얼마나 좋아요, 시간도 많아지고? 좀 피곤하면 어때요, 요즘 같은 때 안 피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돈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분께는 “돈 없으면 죽어요? 돈 없는 걸 왜 불안해해요, 불안할 시간에 뭐든 해서 벌면 되지? 그렇게 불안하면 쓰질 말든지….” 직장이 고민이라는 분께는 과감히 다른 직장을 구해보시라 권하고, 사람이 고민이라는 분께는 왜 꼭 그 사람과 잘 지내려 하느냐고 묻는다.

욕을 먹는 분들껜 그 사람이 욕하는 건 그분 자윤데 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느냐고, 욕을 듣고도 신경 안 쓰는 건 본인의 자윤데 왜 본인의 자유를 못 찾아 먹느냐고 말한다. 말이 그렇지 이런 억지가 고민을 해소해줄 리 만무하지만, 어떻게든 덜어지고만 나면 참 고민이었다는 건 우스우리만치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점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산다. 특별나거나 대단스럽지 않게 산다. 부처님은 대단한 사람 같았다. 성공한 사람은 뭔가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범부들은 어리석어 보였고, 실패한 사람은 못나 보였다. 변화가 계속될수록 반대로, 내가 더 어리석어 보이고, 한없이 못나 보인다.

그런 못남조차 스스로 보듬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실패자들에게 붙던 ‘실패’와 중생들에게 붙던 ‘어리석음’이라는 꼬리표가 떼어진다. 도대체 뭐가 못나고 누가 어리석다는 건가? 실패 없는 성취가 어디 있고 중생 아닌 부처가 어디 있다고. 동시에 부처도 그냥 범부로 보이고, 성공에서도 실패를 본다. 그냥 다 나처럼 보인다. 중생이든 부처든 성공이든 실패든 점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그렇게 특별남과 대단스러움이 점점 덜어지게 된다.

내가 참 찾는 게 많았다는 걸 가만히 있는 가마니가 될수록 느끼게 된다. 행자 시절 새벽에 볼일 보러 나가다 해우소 앞 평상 위에서 흰 가마니가 좌우로 스을쩍씩 움직이고 있는 걸 봤다. 저게 뭔가 하고 가까이 가볼수록 흰 가마니 위에 사람 머리 같은 검은 것이 붙어있었다. 지나칠 때 보니 흰 소복을 입은 사람이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어떻게 볼일을 보는지도 모르게 ‘석가모니불’을 미친 듯이 외우고 행자실까지 냅다 뛰었다.

다음날 도반들에게 귀신을 봤다며 해우소 좀 같이 가달라고 졸랐다. 그때 난 스물여덟의 장정이었다. 몇 년 후 법당에서 흰 한복을 입고 머리를 쪽지고 다니시는 보살님을 보고 나서야 ‘그때 그 귀신이 저분이었구나’ 싶었다. 요즘은 귀신 비스무리한 것들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가마니가 뭐가 대단스럽다는 건지.

견딜 수 없도록 크고 무섭고 대단하고 특출났던 것들이 어느 사이 이렇게 평범해진다. 그렇게 생각도 나이도 생활도 외모도 환경도 소지품도 습관도, 태도와 가치관도 말투와 목소리도 다 덜어내진다. 쉬어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가만히 살게 되는 것이 오늘도 변함없이 배워진다.

[불교신문3641호/2020년1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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