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수행 통해 느낀 고요의 마음
그 어느 행복과 비교할 수 없어

혜인스님
혜인스님

맨날천날이 끝난 다음 천 날은 무문관에서 보내고 싶다. 기도를 한다는 건 정리가 된다는 건지,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관심사들이 차츰 정리되더니, 남은 중요한 문제들은 그만큼 깊어진다. 그렇게 빠져들다 보니, 이걸 안 하곤 못 배기겠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나 보다.

이젠 세간과 출세간을 무슨 모드(mode) 바꾸듯 오가는 지금의 생활도 말끔히 정리하고, 이번 생에 한 번쯤은 미치도록 원 없이 출세간 모드로만 살아봤음 좋겠다. 기도한다는 건 이렇게 마음속 울림이 선명하게 정리되어 가는 건가 보다.

“계획은 그런데 뭐 그때 가봐야 알죠”라고 여느 때처럼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왜인지 그날은 처음 만난 자리였음에도 한마디 말이 더 튀어나왔다.

“언제부턴가 확실한 건 애매하게, 애매한 건 확실하게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

“제가 제 입으로 제 계획을 말하면서, 그때 가봐야 안다고 얼버무리는 건 스스로는 99.9% 확신한다는 뜻이거든요.” 아마도 숨어있는 0.1%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섭고 큰 힘이 되는지를 많이 느껴온 탓에 생긴 버릇일 거다. 반대로 상대방이 너무 애매해 보이면, 좀 정리를 해서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더 확실하게 말하게 되는 버릇 같은 거다.

확신이 커질수록 입밖엔 잘 내지 않게 된다. 그냥 내가 결정하는 게 낫지 남의 의견은 안 궁금한 문제들이라서…. 헌데 그날은 남은 0.1%마저 정리된 날이었던 것 같다. 내 무문관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불교신문에 쓰고 있는 걸 보면.

“스님 제가 잘은 모르지만 감히, 수행은 고행을 위한 일이 아니지 않나요?”

‘이 사람은 벌써 나를 아끼는구나.’ 마음과는 다르게 말하는 버릇이 생긴다는 건, 말 속에 담긴 다른 마음을 느낀다는 것과도 같다. 무문관 계획은 아주 가깝거나 아주 먼 사람을 만날 때만 꺼내 봤는데, 먼 분들은 대부분 무관심, 가까운 분들은 대부분 걱정이 앞섰거늘, 오늘 겨우 두 번째 만난 이분은 벌써 눈가가 촉촉해지신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렇게 사소한 데서 깊게 느껴진다.

“저는 걱정이 아니라 기대가 돼요.” 그날은 정말 마음이 통한 건지, 나도 모르게 나온 내 대답을 들으며 스스로도 정리가 됐다. 며칠 전 부모님이 오셨을 땐, 걱정을 한 아름 쏟아내시길래 고행이 아니란 걸 열심히 설명 드려도 마음이 편치 않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나온 내 말에 이분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보니 서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대화는 이어졌다.

“출세간의 마음을 저는 집착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표현합니다.”

“…?”

기도수행을 통해 느끼는 깊은 고요의 마음이란 세상 그 어느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 그게 좋다고 더 갈구하거나,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집착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는, 놓아버려야 비로소 느껴지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치만 이 마음을 세간에서 찾다 보면, 이렇게 글도 써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눈도 마주쳐야 되고, 대화도, 마음도 나눠야 하는데, 세간에서 출세간의 마음만 좇는다는 건 미친놈 되는 거지.

헌데 미쳐야 하는 때가 와버린 것 같다. 미치지 않고선 미치지 못하는 때가. 그래서 요즘엔 더 세간/출세간의 모드를 바꾸는 일이 피곤하고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렇게 내 마음에서 세간 살이들이 정리되어 간다. 정리되는 만큼 잡을 수 없도록 선명해져 간다. 미쳐 간다. 

[불교신문3621호/2020년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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