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대로
그게 제일 행복한 일상인 걸…

혜인스님
혜인스님

800일이 지나간다. 별일 없이 지나간다. 100일 전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만큼 이런저런 분들이 많이 오셔서 북적대며 지났는데, 이번엔 비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여느 때처럼 평범하고 소소하게 지나간다. 그만큼 생각도 소소해져 이렇다 할 일렁임 없이 잔잔한 마음. 이 고즈넉함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아쉬우면서도 불안하면서도 아늑하다. 그렇다고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이나 들여다볼까.

사실 시시콜콜한 이야기보다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라는 부처님 말씀이 훨씬 좋다. 그래도 좀 덜 시시해서 마음이 가는 콜콜함이 있다면 가만히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잎 보는 것. 하늘에 구름 지나가는 거 보는 것. 흙바닥 어느 쪽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보는 것. 풀밭에 누워 자는 강아지들 보는 것. 햇볕에 널어놓은 빨래들 보는 것. 소리 나지 않는 처마 밑 풍경 보는 것.

며칠 전엔 절 앞마당에 정원을 하나 만들었다. 직접 만들었다기보단 만드는 걸 도와드렸다. 그날 만들려고 했던 것도, 거기에 만들려고 했던 것도, 내가 만들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두어 시간 땅도 갈고 씨도 뿌리고 나니 개운했다. 그 뒤로 며칠째 계속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오늘 아침엔 벌써 싹이 올라온 놈들 보며 안심하면서 아직 싹 틔우지 못한 놈들을 걱정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만든 첫 정원이었다.

우리 절엔 강아지 두 마리가 산다. 원래 셋이었는데 한 놈은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쾌 컸을 텐데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몇 마리가 됐든 내가 키운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냥 같이 사는 거다. 왜냐하면 강아지들이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말 안 하니까. 그저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주려고 하고, 만져달라고 하면 만져주려고 하고, 놀러 가자고 하면 놀러 가려고 한다. 내가 귀여워서, 내가 놀고 싶어서 다가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혼자 있고 싶을 때 다가오면 귀찮으니까.

오랜만에 올라오기로 한 도반이 있었다. 아침에 전화를 했더니 통화가 안 되고 바로 끊어진다. 워낙 두문불출한 스타일이라 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다른 도반한테 그 스님 안부를 물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스님한테서 문자가 온다. 괜히 괘씸한 마음이 들어 삐진 척 장난을 쳤더니, 대뜸 왜 계속 통화 중이냐는 답장이 온다. 에고. 내 전화기가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죄 없는 남 탓이나 하고 있었네. 이으구 이 한심스런 인간아.

기도에 도움이 좀 될까 하여 수행 삼아 저녁을 자주 거르는데, 오늘은 특식으로 냉면을 해주신다 하여 먹으러 갔다. 사실 특별히 맛있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먹는 저녁이기도 하고 신경을 써서 특별히 해주신 정성에 허겁지겁 두 그릇이나 먹었다. 그랬더니 배가 불러 몸은 무겁고, 많이 먹었더니 짜서 갈증 나고. 수행 삼기는 개뿔. 오랜만에 먹는 한 끼 저녁 공양에 허겁지겁 과식하는 탐욕스러움이란. 한 끼 좀 많이 먹었다고 유별 떠는 모습은 또 으이구.

기도한답시고 유별 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기똥차도록 유별나게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남 탓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내 탓도 안 하고 싶다. 같이 사는 반려견으로 보이면서도, 주인 말은 잘 들었으면 좋겠다. 내 정원이 아니니 신경 끄고 싶다가도, 비가 오면 다행스럽고 얼만큼 싹이 올라왔는지 궁금해진다.

일상이란 그런 거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거다. 더 좋은 일상이란 건 없는 거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그게 제일 행복한 일상인 걸 우리가 모르고 사는 거다.

[불교신문3603호/2020년8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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