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궁궐에 도량 열어 왕이 보살계 받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더위에는 물가를 찾게 마련이다. 예로부터 여름의 한복판인 유월보름의 유두(流頭)가 되면 음식을 싸서 시원한 계곡을 찾아 물맞이를 하는 풍속이 성행했다. 계곡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가하면, 점잖은 이들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자연을 즐기는 탁족(濯足)으로 더위를 식혔다. 

이날은 불교와도 관련이 깊다. 고려시대에 보살계도량을 열어 왕이 보살계를 받는 날이 바로 유두였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보살계 수계법회가 봄ㆍ가을에 주로 열리지만 당시에는 ‘유두 보살계’라 할 만큼 짝을 이루는 세시의례였다. 중국에도 없는 ‘고유명절 유두’가 바캉스에 밀려 모두에게 잊힌 것도 서운하지만, 천년역사를 지닌 보살계도량 또한 시기의 전승맥락을 잃어 안타깝다. 
 

2016년 영축총림 통도사의 보살계도량에서 3사 7증사를 모시고 보살계를 수계하는 모습.
2016년 영축총림 통도사의 보살계도량에서 3사 7증사를 모시고 보살계를 수계하는 모습.

물의 명절, 유두

유두는 ‘물의 명절’이다. 유두날 물맞이는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고려 김극기의 문집에 “경주에서는 유월보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을 씻어내는 풍습이 있다. 계음(禊飮)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계음이란 목욕재계로 삿된 기운을 씻어내며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유두 물맞이가 무더위를 피하는 물놀이만이 아니라 심신을 맑히는 정화의식이요, 더위에 지쳐 발병하기 쉬운 한여름에 액을 쫓는 처방이었던 것이다. 

동쪽은 양기 왕성한 곳이기에 유두 물맞이로는 동류수를 으뜸으로 꼽았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東流水)에 머리와 몸을 씻는다(頭沐浴)”는 뜻의 글자를 따서 유두라 했고, 머리에 물을 맞으니 수두(水頭)ㆍ타두(打頭), 머리를 감으니 소두(梳頭)라고도 불렀다. <고려사>에는 유두의 계음이 고려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고 기록하는가 하면, 조선시대의 정동유는 “유두만이 고유풍속이며 그 외의 절일은 중국에서 온 것”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의 세시풍속을 집대성한 6~7세기 <형초세시기>에는 유월보름과 관련된 기록이 없는 대신, 명나라 때부터 시작된 6월 6일의 양경회(晾經會)가 있다. 이는 경서(經書)와 옷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는 것으로, 청나라에 와서는 민간에서 이날 부녀자들이 머리를 감는다고 기록했다. 

우리의 유두계음과 유사한 중국풍습은 삼월 삼짇날이자 뱀의 날인 상사일에 전한다. 4세기에 왕희지와 문인들이 이날 상사계욕(上巳禊浴)이라 하여 몸을 씻어 액을 없애고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 모임을 행했다.

이후 삼짇날의 상사계욕이 중국에 성행했는데, 우리의 가락국에서도 ‘3월 계욕일’에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며 시조를 맞이하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봄의 양기가 충만한 삼짇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 뱀처럼 허물을 벗고 재생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음직하다. 

따라서 이른 시기부터 중국과 나란히 삼짇날의 계욕ㆍ계음이 성행하다가, 신라시대에 와서 본격적인 물맞이가 가능한 유두날, 물놀이를 겸한 정화의식으로 정착된 것이라 여겨진다. 
 

보살계도량에서 연비를 하고 있다.
보살계도량에서 연비를 하고 있다.

정화의식과 결합된 보살계도량

고려시대에는 유두날이면 궁궐에 보살계도량을 열어 왕이 보살계를 받았다. <고려사>에는 유월보름에 국사ㆍ왕사를 비롯한 고승 대덕이 주재하는 가운데 왕이 보살계를 받은 기록이 60여 차례 등장한다. 보살계를 거듭 받은 왕도 여럿 있을 뿐더러, 인종은 25년의 재위기간 동안 열여섯 차례나 보살계를 받았다. 보살계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실천덕목이다. 따라서 국왕이 주기적으로 보살계를 받은 것은 스스로 불제자임을 다짐하고 널리 선언하는 의식이기도 하였다. 

보살계도량을 6월 보름에 열게 된 유래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유두의 물맞이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보살계 수계에 적합한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 자연스레 유추된다. 아울러 지금은 보살계도량에서 수계의 상징으로 연비(燃臂)를 하지만, 밀교가 발달했던 고려불교에서는 정수리에 물을 뿌리는 관정(灌頂)이 따랐을 법하다. 

더위와 함께 온갖 재액을 씻어내는 유두의 물맞이가 보살계도량과 결합함으로써 물의 상징성을 되새겨보게 한다. 물이 지닌 정화능력은 종교적 의미망 속에서 ‘새로운 탄생’과 같은 뜻을 지니는데, 주변의 삿된 기운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 내면의 변화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관욕(灌浴)은 물론, 법회를 열 때 뿌리는 법수(法水)도 도량 정화와 함께 동참대중의 번뇌와 업을 씻기 위함이다. 기독교의 세례(洗禮)와 침례(浸禮), 남방불교국가에서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송끄란 등의 물축제, 인도 갠지스강에 부여된 엄청난 정화력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니 유두와 보살계도량의 결합은 참으로 적절하다. 올바른 불자로서 살겠다는 다짐과 함께, 번뇌의 업을 씻고 맑은 심신으로 성스러운 영역에 들어서는 종교적 시공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수계도량의 환희로움

계율도량으로서 정체성을 지닌 영축총림 통도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5일부터 사흘간 보살계수계 산림법회를 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계를 설하여 출자자의 수계처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 또한 이곳에서 계를 받았다고 하였다.

2016년의 보살계도량은 3사(師) 7증사(證師)를 모시고 사부대중 3천여 명과 함께 정진의 문을 열었다. 전계사가 보살계 수계의 의미를 밝히고, 갈마사와 교수사가 10중대계ㆍ48경계의 계목 하나하나에 대해 설하였다. 새벽예불부터 기도, 설계법회, 저녁예불까지 참여하며 삼일 철야정진에 드는 동참신도들도 많았다. 

회향일에는 금강계단 앞에서 수계첩을 배부 받아, 보자기에 소중히 싸서 각자 어깨에 멘 채 수계가 이어졌다. 수계 30회를 맞은 이들을 비롯해 10년 이상 꾸준히 동참해온 77인의 불자에게 기념패와 메달이 안겨졌고, 15년째 제주도에서 수계에 참여한 94세의 불자는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연비를 마친 이들은 머리에 보살계첩을 이고 금강계단을 돌며 참된 불자로 거듭나고자 마음을 다졌다. 보살계 실천을 서원하는 사부대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환희로운 탑돌이였다. 

2015년에 동참한 마곡사의 보살계도량은 10월 30일부터 일주일간의 자비도량참법기도를 마친 다음날, 삼사 칠증사를 모시고 사흘간 이어졌다. 보살계를 받기 전에 참회 정진하는 칠일기도를 올렸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자기정화의 의식인 셈이다.

대흥사에서는 4월의 서산대사 탄일에 보살계도량을 함께 열어, 조사 스님의 뜻을 새기며 보살계를 수지하는 의미를 심화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법주사에서는 보살계도량이 10월 속리산 문화축제의 중심의식으로 자리 잡아 가을 불교축제의 면모를 환히 밝힌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다짐하는 보살계도량이 전국에서 펼쳐지고, 불자들은 거듭거듭 보살계를 받는다. 해마다 불자로서 새겨야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니 그 자체로 더없이 환희로운 정화의식이다. 
 

제주의 유두 물맞이 장면.Ⓒ제주일보
제주의 유두 물맞이 장면. Ⓒ제주일보

공동체 풍요 비는 유두고사

보살계도량뿐만 아니라 유두날에 불공을 올리는 전통도 깊다. 유두는 새로 나온 수확물을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올리는 천신(薦新)의 명절이기도 하다. 민간에서는 참외과 수박 같은 햇과일과 함께 햇곡으로 시절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 이를 유두천신, 유두차례, 유두고사 등이라 불렀다. 불자들은 이날 절에 가서 불단을 비롯한 각단에 공양을 올리며 유두불공으로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유두고사는 곡식과 과실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신제(農神祭)의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농촌에서는 떡을 해서 논두렁과 밭두렁에 차리고 풍년을 빌었는데 이때 국수, 팥죽, 수제비 등을 뿌리기도 한다. 국수같이 줄기가 길고 수제비처럼 열매가 많이 맺기를 바라는 뜻이며, 팥죽에는 벽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산간에서는 논의 물꼬와 논둑 밑에 찰떡을 한 덩이씩 놓아 물이 새지 않도록 주술을 쓰는가하면, 물이 귀한 다랭이 논에는 논둑의 사방에 청솔가지를 꽂고 금줄을 쳐서 물이 마르지 않기를 빌었다. 

유두날의 벽사(辟邪)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구슬처럼 둥글게 빚은 유두면을 삶아먹으면 더위를 막고 장수한다 하였고, 구슬모양에 오색 물을 들여 색실로 꿰어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두면서 액운을 막았다. 모두 여름의 한가운데서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꾸려나가기 위한 적극적인 대처방안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은 것이며, 물이 도(道)에 가장 가깝다고 하였다. 강이나 바다가 이 세상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은 아래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이로움을 주지만 위에 머물지 않고 아래에 처함으로써 만물을 포용하여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말은 자연을 본받으며 살 때 참된 생명력으로 진정한 도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보살계도량과 결합한 유두 물맞이가 물이 지닌 종교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듯, 유월보름은 물을 본받고 자연을 본받는 날로 삼을 만하다. 

[불교신문3601호/2020년7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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