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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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엄마보다 정겹게 느껴진다. 초등학교 때는 방학만 하면 할머니가 계시는 큰집에 가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는 부산에서 완행열차를 타면 대구까지 네 시간이나 걸렸지만 하나도 지겹지가 않았다. 

가수 김호중이 부른 ‘할무니’라는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가사 내용이 가슴이 저리도록 절절해서다. 부모 아래서 자라도 할머니가 그립거늘, 결손가정에서 할머니 손에 컸으니 오죽하겠는가싶다. 

어릴 땐 이다음에 커서 돈을 벌면 할머니에게 뭐든 다 해드리고 싶었다. 첫 월급을 받아 꽃무늬가 든 빨강 융 속바지를 할머니에게 사 드렸다. 웃어른에게 빨간 내의를 선물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할머니는 손녀가 사준 게 기특해선지 오는 사람마다 치마를 걷어 내보이며 자랑했다고 한다. 

핵가족 시대로 가면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이 드물다. 학교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예의범절이 바르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잔소리와 함께 가르침을 주어서 일게다. 잔소리를 안 듣고 자란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을 듯싶다. 예전에는 동네 어른들이 야단을 쳐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고깝게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당신이 뭔데’도 모자라 폭력까지 휘두르니 세상이 점점 무서워지는 것 같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뿐인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용돈을 주지 못할 형편이면 가족이라는 개념을 떠나 능력 없는 늙은이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세태이다. “내 강아지”라며 품에 안고 볼을 비비며 귀여워하는 조부모들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요즘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니 이웃 간에 왕래는 물론, 집안 식구들조차 안심하고 마주앉아 이야기하기 힘든 나날이다. 감기 기운만 있어도 서로 꺼리기 때문에 자중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기가 막힌 현실이다. 언제 오순도순 사이좋게 앉아 서로 웃으며 대화할 날이 오려나 기다려진다.

이런 때 ‘할무니’라는 노래가 나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경로사상을 일부러 부르짖지 않아도 노래 하나로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그려내 지금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누구나 다 어렸을 적에 조부모뿐만 아니라 주변의 친척들과의 교류 등으로 정이 넘쳤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다시금 옛날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오가는 그런 날이 돌아오기를 바래본다.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면 할머니의 따스한 가슴이 더더욱 그리워진다.

[불교신문3595호/2020년7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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