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성보박물관에서 만난 일엽스님
가슴 아프고 처연했던 출가 전 인연
꿈꿨던 자유 평등세계 만난 출가 후
사람은 가도 글은 남아 감동과 깨달음
60 넘은 나이에도 잊지못할 스님의 시

황건
황건

바이러스로 세상이 어지럽건만 계절은 바뀌어 어김없이 봄이 찾아와 나뭇가지에는 봉오리가 매달려 있다. 봄비가 내릴 것이며, 꽃도 필 것이다. 꽃이 피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15세기 일본 아시카가 막부에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전국시대 무장으로 에도성을 축조한 장본인이다. 젊고 기고만장한 무사 시절, 그는 사냥을 갔다가 폭우를 만났다. 어떤 초가집에 들르 비옷(일본말로 미노)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젊은 여인이 수줍어하면서 어딘가 가더니, 아무 말 없이 꽃나무 한 가지를 들고 와 내밀었다. 그는 화가 나서 꽃나무를 던져 버리고 집을 나와 비를 맞으며 성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 사건을 친구들에게 이야기 하였고, 그들의 대답에서 그 뜻을 깨우쳤다. 

“이사람아, 그건 자네가 무식한 거야. ‘일곱 번 여덟 번 아름다운 꽃잎은 피어있지만 열매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七重八重 花は咲けども 山吹の美濃 一つ無きぞ 悲しけれ)’라는 옛 시가 있네. 여기서 ‘미노(美濃)’는 ‘열매’와 ‘비옷’ 두 가지 뜻이 있다네. 그 꽃나무는 황매화(山吹, Kerria japonica)였을 것이네.” 

그 여인은 “저희 집에는 비옷이 없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꽃나무 가지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후에 승려가 되었고, 시인도 되었다.

세월은 흘러 그의 집안은 명문가로 내려왔으며, 자손들도 문학적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그 중에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를 다니던 오따 세이조(太田淸長, ?~1970)가 있었다. 그는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이상형으로 그리던 여성을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이 생겼다. 그 명문가 집안에서는 그녀가 조선인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의 딸이며, 이혼녀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여 사랑은 열매맺지 못하였다. 아들을 세이조에게 맡기고 그녀는 귀국하였고, 이 후 세이조는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바로 유명한 시인이며 수필가인 김일엽스님(金一葉, 1896~1971)이다.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춘원 이광수가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이 ‘일엽’이다. 33세에 출가한 그녀는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살 아들을 만나자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말했다. 후일 그 아들은 이름난 화가가 되었고, 승려가 되었다(김태신, 1922~2014).

얼마 전 어머니를 모시고 수덕사에 갔었다. 성보박물관 고승유품관에는 경허, 만공스님 유품 뿐 아니라 일엽스님이 쓰던 만년필과 원고지에 써 내려간 원고도 전시되어 있었다.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아 “큰 웃음 한 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는 짤막한 사연과 함께 예쁜 꽃도 그려져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할 때 일주문을 걸어 나왔다. 

그녀의 시 ‘수덕사의 석양’이 생각났다. “덕숭산 수덕사의 지는 해는/ 청춘을 불살랐던 여승들의 최후와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 내가 열네살 때 열반에 든 한 비구니가 60을 훌쩍 넘은 한 남자의 가슴에 복숭아꽃을 피게 한다.

[불교신문3571호/2020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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