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 행복하길 서원해야

감각적 쾌락, 물질과 명예
성취감 육신의 편함 주지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아

등현스님
등현스님

인생을 아름답게 살려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자신이 행복을 원하는지 성공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행복을 위한 행위인지 성공을 위한 행위인지도 알아야 하는데, 성공을 위한 행위와 행복을 위한 행위는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은 마음이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이고, 이러한 상태는 첫째, 신체적으로 계를 어기지 않고, 둘째, 심리적으로 계를 범하고 악행을 한 것에 대한 참회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때 마음이 가라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몸, 마음, 대상 그 어떤 것도 붙들고 집착하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길을 아라한의 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원하면서 행복과는 관련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즉, 행복을 감각적 쾌락 혹은 물질, 명예 등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과 명예라고 하는 것은 성취감과 육신의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다. 물질과 명예는 성공의 법칙에 해당하고, 행복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공을 원한다면 성공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초기 불교의 수행이 여섯가지 감각 기관을 멈추고, 다스리고 해체해서 해탈하는 행복의 길을 강조한다면, 금강경의 수행은 해탈을 통한 행복의 성취와 원력의 성취를 통한 성공의 길이라는 양면의 수행을 강조한다. 행복의 성취는 나와 나의 대상인 3계에 대한 집착만 없으면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세간의 성공은 무욕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고, 욕구와 욕망의 법칙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의 법칙이다. 

성공을 하려면 염력의 법칙을 잘 활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염력은 마음을 한군데 모아서 간절히 바라는 것인데 대승의 언어로는 서원이라고도 한다. 초기와 대승 불교, 행복의 불교와 성공의 불교의 차이점은 간절함과 서원의 차이에 있다. 간절히 일념에 집중하는 것을 초기 불교에서는 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삼매는 일념 집중에 간절한 기원, 소원이 추가된다.

감정은 자석과 같아서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에는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 즉,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이 있다. 감정에는 눈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는 감정이 더 강하면 싫어하는 환경을 끌어당기고, 좋아하는 감정이 더 강하면 좋아하는 환경을 끌어당기게 된다. 

좋아하는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첫째 서원을 세워야 된다. 둘째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발보리심)은 서원 중에 최상이다. 셋째 마음속에 있는 좋지 않은 부정적인 기억을 씻어내야 하고 넷째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머물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좋은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길이다.

모든 중생이 완전한 행복(부처)을 성취하기를 서원하는(adhisthana) 발보리심(Bodhi cittam upadhyate)이 그것이고, 그 길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보살승인 것이다. 이처럼 서원은 보살승의 중심되는 첫째 사상이다. 

둘째, 성공의 법칙은 바로 육바라밀을 통해 이뤄지는 수행이다. 인욕과 정진을 통해서 작은 성공을 얻을 수 있고, 좀 더 큰 성공은 보시와 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계를 통해서 실패의 길을 차단하고, 보시를 통해서는 계산할 수 없는 성공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성취를 이루려면 편안한 가운데 마음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그러나 선정과 지혜만을 닦는다면 오직 마음의 평화만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시와 지계, 정진과 인욕은 성공의 법칙에 해당하고, 선정과 지혜는 바로 행복의 법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금강경 4장에서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布施)하는 응무소주행어보시’의 양면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불교신문3557호/2020년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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